벙커 트릴로지 - 맥베스

벙커 트릴로지 - 맥베스, 전쟁의 끝

1918년 11월 11일 11시,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한다.

존경받는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대가 있다. 전쟁의 끝을 앞두고 즐겁게 연극을 한다.
-
아니, 총살형을 각오한 병사 셋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의 끝에서 장군을 처형하기 위해 연극을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맥베스'는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승리한 측인 영국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전쟁의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같은 듯 다른 듯 각자 흘러가던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시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맥베스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관객을 병사5의 역할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영국군 신병으로 마크 장군님께 경례도 해야하고, 독가스에 죽은 병사들, 병동의 아픈 병사들, 마크 장군의 죽음에 동조한 병사들, 그리고 전쟁의 증인이라는 역할을 받는다. 거기에 더해서 연극 중에는 맥베스 왕의 연회에 초대된 손님이자 말콤 왕자를 따르는 버넘 숲의 병사 역할도 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 경례하고 군번줄 흔드는 것 뿐이지만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나도 모르게 작품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모르가나나 아가멤논은 사실 아더왕 전설이나 그리스 신화를 아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데, 맥베스 만큼은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알고 있을 때 소름끼치는 느낌이 몇 배로 다가온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20세기 영국군 참호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연극을 시작할 때 종전을 앞둔 상황과 달리 참호 안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전쟁의 끝을 앞두고 기뻐할 법 하지만 배우들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있고 긴장으로 뻣뻣하다. 이는 분명 세 사람이 각오한 결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맥베스'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시점은 마크 장군이 아직 중위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100야드, 고작 100야드 전진했어!
대체 상부에선 무슨 생각인 거야? 작전이 있긴 해?
......
뭐, 이렇게 서로 미친듯이 쏴대다가 어느 한 쪽 총알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작전이겠지.

마크와 벤은 불합리한 상부의 작전에 분노하고 병사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드물게 훌륭한 장교였다. 아마 매튜나 제임스같은 병사들이 밝은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이들 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선 다들 썩은 물 때문에 설사를 하는데!
그래서 물에 석회를 타서 끓이잖아.
그럼 그 물이 마셔도 되는 물인지 썩은 물인지 구분도 안 된다고! 근데 차로 몇 마일만 더 가면 후방에선 차를 마시고 있어.
진짜 홍차를!

마크는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쟁의 광기가 강해지면서 더 비인간적이고 말도 안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홍차는 그 은유적인 객체로 등장한다.

홍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밝은 조명과 아름다운 음악, 예쁜 찻잔, 따뜻한 적갈색 액체, 피어오르는 향, 우유를 넣으면 하얗게 번지는 모양새, 함께 즐기는 달콤한 디저트, 느긋한 여유, 평화, 고상함. 이 모든 건 전쟁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같은 전선 안에서도 누군가는 그걸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투표를 했다면 마크가 장군이 됐을 거라는 둥, 공화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겉으로 유하고 물렁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벤이지만 사실 가장 단단하고 굳센데다가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벤이 살아남았다면(ㅠㅠㅠ) 책을 썼을 것이고 전쟁을 막으려 노력하고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 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있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개인적으로 맥베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남아있는 것이 이 때의 벤의 선언이다. 괜찮은 척 하지만 사실은 잠 못 이루고 힘들어하던 사람, 책 속으로 도망치며 겨우 버텨온 시간들, 그리고 그 끝에서 얻은 교훈. 안경 너머의 눈빛과 책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제스쳐, 글자 하나하나에 묵직하게 실린 감정이 가슴에 훅 밀려들어온다. 자신이 지독하게 겪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마크의 승진 소식. 여기서 '코더 대대를 이끌게 되었다' 고 소개하는데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코더의 영주가 된다'는 것과 연결된다. 벤은 반쯤 장난으로 경례를 붙이는데, 여기서 마크 역의 배우들의 표현이 다른 게 재밌었다. 박은석은 화들짝 손사래 치면서 아우, 그런 거 하지 마~ 민망해 한다면 그 대사 신성민은 안 했다. 왠지 좀 즐기는 것 같았어.

갑자기 독가스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마크는 매튜에게 자신의 방독면을 씌워준다. 단순히 연락하려고 온 그에게 나눠줄 여분이 없는 상황에서 목숨 걸고 부하를 먼저 챙긴 거다. 정작 자신은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버티면서. 마크가 부대 내 가장 훌륭한 장교로 꼽힌 것도 능력 뿐만 아니라 이런 성품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독가스의 중독되며 맥베스의 마녀의 예언 장면이 겹쳐진다.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이며,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그 예언은 극중 맥베스를 파멸로 이끄는 예언이기도 했고, 현실에선 독가스에 정신을 잃은 마크의 꿈 또는 환각이기도 했다.

다들 네가 장군이었다면 이정도로 최악은 아니었을 거라고 해.
만약 투표로 장군을 뽑는다면 분명 네가 장군으로 추대될 거라고 말이야.
......
난, 당신같은 사람이 장군이 되면 좋겠어요.
그럼 최소한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죠.

벤과 릴리의 이 대사는 마녀들의 예언처럼 마크에게 전해진다. 예언이라기보다 그저 바램이지만, 결국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맥베스는 초반에 꽤 가벼운 장면들이 많다. 마크와 벤의 이야기, 병원에서 마크와 릴리가 보여주는 미묘한 긴장과 둘을 놀리는 듯 아닌 듯한 매튜. 그러나 배경이 영국군 참호를 벗어나 '연극 맥베스'가 되는 순간 긴장감은 크게 높아진다.

마치 찬란한 등극의 서막같다.
내가 왕이 될 운명인가.
내가 애쓰지 않아도 왕관은 내 것이란 말인가.
두려운 암시다.
내가 왕이 되려면 지금의 왕이 죽어야 한다.
......
말콤 왕자가 있으나 맥베스가 왕이 된다.
그리고 퓰리어스가 왕이 된단 말인가.
맥베스의 자손이 아닌 나의 아들이 왕이 된다.
마치 찬란한 비극의 서막 같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와 벤쿠오의 반응은 이다지도 달랐다. 글래미스의 영주에서 코더의 영주가 되며 예언을 이룬 맥베스와 그를 따르면서도 경계하는 벤쿠오의 관계는 마크와 벤을 그대로 닮아있다. 벤 또한 마크의 승진을 예상하긴 했지만 곧바로 소령이 될 줄은 몰랐고, 그 점에 대해 축하와 동시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벤쿠오의 심정을 읽은 듯이 말을 돌리는 맥베스 역시 이미 벤쿠오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연극 맥베스와 영국군의 현실이 가장 절묘하게 맞물리는 순간은 편지와 던컨왕의 죽음이다.
마크가 릴리에게 준 편지가 맥베스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되고, 드레이크 장군의 죽음이 던컨 왕의 죽음으로 은유되는 순간, 그 연결이 짜릿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신이시여,
이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그래서 제 기도를 들어줄 수 없다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내가, 맥베스의 부인인 내가 마녀들의 말이 진실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언제 들어도 늘 무서운 레이디 맥베스의 기도에 이어, 마크가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마크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장군이 돌아가면 자신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당할테니. 잘못이라고는 그저 작전이 필요하다고 말 한 마디 한 것 뿐인데, 희생이 작전이라는 개소리에 반박한 것 뿐인데. 분명 드레이크 장군은 쓰레기였고, 마크는 어쩌면 그를 살해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벤...

그 때부터 맥베스는 잠들지 못하는 날을 보낸다. 피로 물든 손을 닦으며 악몽에 시달리고 후회를 거듭하기 시작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나약해지는 맥베스를 더 진득한 광기로 이끈다. 빨간색 레이저가 핏빛처럼 손을 적시고 달아날 곳 없는 끝으로 둘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한 마크와 릴리도 잠들지 못하고 시달리게 된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노라.
더 이상 잠들 수 없다.
하루의 삶 끝에 오는 죽음,
엉킨 근심의 실타래를 푸는 그것,
생명을 위한 식사,
맥베스는 그 잠을 죽였노라.

영국군으로 돌아오면, 마크는 사망한 드레이크 장군을 대신해 임시로 장군이 된다. 마크가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했다는 걸 아는 목격자, 벤은 언제나처럼 책을 읽으며 고민을 털어낸다.

분명 던컨왕의 죽음은 너의 짓일 것이다.
......
허나 다음 왕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나다.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하자.
...그래, 조용히, 조용히 하자...

마지막 말은 벤이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크의 살인을 함구하자, 입을 다물자. 진실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이 그토록 곧은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그러나 벤은 아직 마크를 믿고 있었다.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처음의 허물없는 모습이 아니다.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마크와 왠지 거리를 두고 어색해하는 벤, 둘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는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벤쿠오를 경계하는 모습과 그대로 연결된다.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벤쿠오 뿐이다.
벤쿠오의 고결한 성품이 두렵다.
마녀들은 내 머리에 열매를 맺지 못할 왕관을 씌워주고,
손에는 말라붙은 왕홀을 쥐여줬다.
내가 왕관을 쓴 머리로 잠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벤이 외출 나가기 전 '읽어봐' 라고 말하는 듯 찍어준 페이지에는 마크의 두려움을 꿰뚫는 구절이 씌여있다. 마크는 친구인 벤의 고결한 성품을 잘 알았고, 그가 진실을 알까 두려워했다. 벤의 성격 상 진실을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마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읽던 책을 쾅 내리치면서 발성 싹 바뀌고 '맥베스'로 연결되는 연출이 정말 좋았다.

분명 시작할 때는 레이디 맥베스가 맥베스를 이끌어 왕을 죽이고자 했는데, 이 시점에서 주체가 달라진다.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깨기 위해 부자를 동시에 죽이려 계략을 세우는 맥베스와 그 모습에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보이는 레이디 맥베스가 있다. 이는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릴리의 감정과도 연결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매튜와 제임스가 마크 장군 방을 만드는 장면인데, 전체 에피소드 중에 유일하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곳이다. 긴장을 좀 풀고 가라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매튜의 동생 톰이 상병으로 진급했다는 얘기를 기본으로 각종 애드립의 향연이 펼쳐졌다. 박민성과 강승호가 만났을 때 제일 재밌었다. 둘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하찮은 덤앤더머가 되서 서로 귀여워하고 디스하고, 매우 흥미진진했다. 언젠가부터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던 씬이다. 다음에 매튜가 장군 흉내 내는 것도 워낙 하찮고 웃겨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게 좋았고, 마크 들어오면서 공기가 확 식는 그 느낌마저도 좋았다.

장군이 된 마크가 들어오면서 공기는 달라진다. 여기서도 배우들마다 변해가는 포인트가 다른 것이 재미있었다. 박은석은 이미 방에 들어올 때부터 살짝 맛이 가기 시작했고, 신성민은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만 해도 원래의 마크 테일러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매튜가 장군 흉내 내는 걸 보고 장난스레 동조해주다가 괜찮다고 웃어주는 장군이었다.

아쉬우실 것 같습니다.
여기 잠시 계시다가 정식으로 부임받은 분이 오시면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임시로 저희를 지휘하시는 거지만, 그래도 계속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다들 불만이 많았거든요.

매튜가 보여주는 마크에 대한 무한 신뢰는 마크가 훌륭한 장군이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맥베스의 불안이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예언 때문이었다면 마크의 불안은 임시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누군가 자신의 살인을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바그너와 홍차. 그 때부터 마크는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다. 누가 그걸 뿌리칠 수 있을까.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주어졌다. 남의 것이기에 쳐다볼 생각조차 않던 것들이 손에 떨어졌다. 이 달콤한 유혹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조심스럽게 찻잔을 집어들고 한 모금 음미하다가 지도 위의 동그란 자국에 굳이 찻잔을 맞추어 놓아본다. 음악이 높아지며 눈빛이 변해간다. 이 자리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지도 위에서 마치 놀이를 하듯이 사람과 말 모형을 흩뿌린다. 소름돋는 기관총소리와 아련히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 위를 덮는 바그너의 음악. 이곳은 전쟁터였으나 전쟁터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비명은 멀리서만 환상처럼 들려오고, 후방에 물러나 앉은 장군에게 죽어가는 병사들은 넘어지는 인형 만큼이나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한다.

어이, 신병! 훈련장과 전쟁터의 차이를 아는가?
실제로 적은 있다는 거.
그리고, 실제로 장군은 없다는 거.
......
너도 이제 여기 없겠구나.
...뭐?
장군은 전쟁터에 없다.

마크 테일러 중위는 '전쟁터에 있던' 장교였고 존경받는 상관이었다. 그러나 마크 테일러 장군은 '전쟁터에 없는' 장군이 되어버린다. 처음엔 자신은 다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드레이크 장군처럼 그렇게 아무나 쉽게 희생시키고 작전없이 무모하게 굴지 않을 거라고. 자신은 분명 더 나을 거라고 자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같아졌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벤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마크를 찾아간다. 한 때 동고동락했던 전우, 믿을 수 있었던 친구.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맞붙는 이 장면은 맥베스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장면 중 하나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벤과 그를 짓누르려는 마크의 기세가 날카롭게 부딪힌다. 마크가 벤의 기를 누르려고 보이는 행동도 배우마다 달랐는데, 신성민은 지휘봉을 테이블에 세게 내리치면서 공기를 확 식게 만들다가 벤이 팔을 붙잡으니 놓을 때까지 노려보고 어깨에 대고 피아노 치면서 여유를 부리다가 하며 사람을 쥐락펴락 했다. 빈정대는 듯한 서늘한 눈빛이 아주 일품이었다. 박은석은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잡힌 팔을 탁 쳐내고 멱살잡아 돌려 세워져있던 옷깃 촥촥 접어주는데 세상 그렇게 재수없을 수가 없었다.

드레이크 죽은 걸 보고하지 않은 이유는 드레이크가 살인자이기 때문이었어. 군인이 아니라 살인자!
넌 아니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벤은 그 순간까지도 희망을 갖고 있었다. 분명 편지 얘기는 그를 마지막으로 떠보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테이블 위의 작전지도, 그 위의 동그란 찻잔자국. 벤의 손끝이 찻잔 자국을 꾹 누르듯이 덧그리고 눈빛에 슬픔이 들어찬다. 변해버린 친구를 향한 안타까움과 단호한 결심.

네 말을 믿을까?
상관없어. 난 진실을 말하는 게 중요해.
그래? 그래... 너한테는 그렇겠다.
그런데 그거 하극상이고 반역이다?
뭐라고?
넌 총살이라고!

자신을 거침없이 쏘고 품에서 편지부터 찾는 마크를 보는 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마크, 마크,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건, 탕-. 숨통을 끊어놓는 총소리 뿐이다. 벤 중위의 죽음은 그대로 벤쿠오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벤이 마크에게 이야기하면서 쓰고있던 안경을 벗는데, 앞서 잠깐 나온 벤쿠오가 안경을 안 쓰는 덕분에, 죽은 벤은 그대로 벤쿠오의 유령이 되어 맥베스의 연회에 나타난다. 맥베스의 악몽에 벤쿠오가 있었듯이, 마크의 악몽에는 벤이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맥베스를 향한 벤쿠오의 원망은 마크를 향한 벤의 질책이기도 했다.

맥베스, 맥더프를 조심하라!
맥베스, 너의 눈에 나타난 모든 것은 널 슬프게 하리라.
버넘 숲이 던시네일로 전진하지 않는 한 너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여인이 낳은 자는 너를 해칠 수 없으리라.

던컨과 벤쿠오를 연이어 살해한 맥베스는 맥더프의 가족들까지 살해하며 돌아올 수 없는 광기의 끝으로 달려간다. 배우의 활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연출이긴 하지만 마녀들이 가면을 벗으면서 맥베스의 악몽인 던컨, 벤쿠오의 모습으로 서늘하게 맥베스를 압박하는 장면이 좋았다. 아무 감정 없이 죽은 사람 또는 인형처럼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는 그들이 맥베스에겐 공포 그 이상의 존재였을테니.

원작의 유명한 매드씬, 레이디 맥베스의 붉은 손과 강박적인 행동은 릴리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맥더프 장군의 가족이 죽는 것은 매튜의 동생 톰이 처형당하는 것으로 겹쳐진다.

릴리는 죽어가는 병사를 살리려고 지혈을 하다가 손이 붉게 물들었다. 레이디 맥베스는 살인의 공포로 피로 물든 손의 환상을 본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새빨간 악몽은 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사람 몸에는 피가 정말 많아요.
전 몰랐어요.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에요.
아무리 향기로운 향수를 쓴다 해도 이제 이 작은 손 하나를 다시 향기롭게 만들 수는 없겠죠.

전쟁의 공포로 스스로 손을 찌른 매튜의 동생 톰은 제임스의 손에 이끌려온다.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보지만,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소리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장군의 냉정한 명령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상병으로 진급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었다. 동생을 그대로 보내야 하는 매튜나, 데리고 갈 수 밖에 없는 제임스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릴리, 그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제임스 자신, 또는 그들 넷 전부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 목숨을 왜 바치지 않았냐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같은 편이잖아!
전쟁은, 적군을 죽이는 거 아니에요?!
......
적들도 우리와 같을 거에요.

매튜의 이 대사는 맥베스에서 가장 감정을 심하게 뒤흔든다. 김바다는 불편한 다리를 원망스러운 듯 쾅쾅 치면서 울먹여서 아마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달려가서 막아서든 함께 가든 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때 매튜가 처음으로 자신의 다리를 탓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끌려나가서 처형당하는 톰을 마크 장군인 병사2가 연기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배우 활용의 문제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는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톰의 처형 시점에서 아마 제임스와 릴리, 매튜는 마크 장군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매튜는 죽은 동생을 위해, 제임스는 사죄의 뜻을 담아, 릴리는 불합리함을 견디다 못해서.

그래서 맥베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콤, 맥더프, 맥베스의 전투씬은 굉장히 흥미롭다. 말콤을 연기하는 제임스는 그 순간 '말콤'이 아니라 '제임스'로써 '마크'를 대하고, 맥더프를 연기하는 매튜는 '매튜'로 '마크'를 본다. 오직 마크만이 '맥베스'의 시선으로 '말콤'과 '매튜'를 본다. 이런 엇갈림이 배우들의 눈빛만으로 전달이 된다. 말콤이 내뱉는 대사들은 명백히 제임스의 울분을 담고 있었고 맥더프가 쏘아붙이는 말들은 매튜의 한이었다.

맥베스!
나는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너를 죽여서 기괴한 동물을 전시하듯 전시할 것이다.
.....
보라! 이 폭군을 보라!
보라! 이 미친 권력자를 보라!
자신의 권력과 욕망에 눈이 멀어
전우들을 무참히 희생시킨...!
전쟁이 낳은 괴물,
마크 테일러 장군을 보라...!

매튜의 이 연설 끝에 마크 테일러의 이름이 나오면서 조명이 탁 바뀌는 연출은 가히 천재적이다. 순식간에 클라이막스로 향해 뜨겁게 내달리던 연극은 끝나고 서늘한 긴장이 새롭게 차오른다. 그리고 세 사람은 마크 테일러 장군을 사살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병사5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크 테일러의 죽음을 방관하거나 지지한 병사 역할을 맡아 장군의 명령을 감히 거역해야 하는 중책이다(?). 특히 박은석이 객석을 향해 체포를 명령하는 통에 그 느낌이 배로 살아났다. (장군님저희한테왜그러세요ㅠㅠㅠ)

마크의 죽음 이후 세 사람이 번갈아 이야기하는 세익스피어의 대사들은 종전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러 번을 들어도 늘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르는 대사다.

우리는 이 전쟁의 증인입니다.
살아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대신 그들이 죽은것 뿐.
천 만 명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진실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곧 종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부디 저희와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
꺼져라, 꺼져라, 찰나의 촛불이여
인생이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머무르는 동안은 우쭐대고 투덜대며 걷지만
곧바로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그것은 바보천치들이 지껄이는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의미없는 이야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드리우고
어둠 속을 걷는 배우들은 빛을 향해 걸어가나니
이 초가 다 타 한숨처럼 꺼진다 해도
우리의 눈동자는 꺼지지 않고 영원히 빛날 것이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찬란한 촛불이여
버넘 숲을 태우고 던시네일로 향하며 우리 모두를 비추어라
타올라라 타올라라 찬란한 촛불이여

그리하여 관객들은 주어진 마지막 역할, 전쟁의 증인으로써 함께 군번줄을 흔들며 떠나간 병사들의 삶을 추모하게 된다. 그 때 한 마음으로 군번줄을 흔들면서 심장이 뒤흔들리는 그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안도감, 감격, 감동, 슬픔,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친다. 그렇게 벙커 트릴로지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맥베스는 완전하게 닫힌 결말로 막을 내린다.

마크 테일러는 전쟁 그 자체를 은유한다. 처음에는 나쁜 의도가 없었으나 가혹한 상황 속에 변해가고 인간성을 잃어가고 끝내 광기로까지 치닫는 과정을 한 인물에게 그대로 투영한다. 그리하여 마크 테일러, 전쟁 그 자체인 인물을 죽임으로써 '전쟁을 죽인다'. 그래서 맥베스는 가장 후련하고 마음 편한 엔딩이다.

벙커 트릴로지는 각각의 에피소드이지만, 이야기를 연결시키고 관통하는 상징이 있다.
- 모르가나에서 아이들이 들은 휘파람 소리는 알베르트가 휘파람부는 소리였을지도
- 가웨인과 랜슬롯은 알베르트의 총에 죽었을지도
- 영국군에 들어간 크리스틴의 미래는 릴리의 모습이었을지도
- 아가멤논에서 알베르트가 죽인 영국군은 모르가나의 아더였을지도
-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 가웨인, 알베르트, 마크(맥베스), 릴리(레이디 맥베스)
- 베개: 잠, 안식, 죽음, 살인


맥베스 최고의 조합은 신성민 이진희 김바다. 마크와 맥베스, 릴리와 레이디 맥베스, 매튜와 맥더프 사이의 접점과 감정 흐름을 가장 세심하게 잡아냈다. 신성민의 예민하고 도도한 마크는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맥베스의 성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진희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레이디 맥베스 톤은 릴리의 성품을 반영한다. 김바다의 맥더프는 매튜의 눈빛과 감정을 품고 있었다.

본진 이즈 뭔들... 이라지만 박민성 벤/벤쿠오/제임스/말콤 캐릭터 다 좋았고. 특히 '제임스'가 '말콤'을 연기하는데 다른 생각(마크 죽일생각) 하느라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제임스'라는 다층적인 연기가 참 좋았다. 안경 쓴 비주얼도 좋았고. 고전 대사톤도 예상 밖으로 너무 좋아서 나중에 진짜 세익스피어 한 번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전 톤으로는 박은석도 정말 좋았고 둘이 케미도 좋아서 나중에 고전으로 같은 무대 해도 좋을 것 같다.

전캐를 찍었지만 오종혁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말 하나같이 안취향이었기 때문. 하필 내가 본 날 대사 실수도 엄청 많았고, 감정, 발성, 연기 모두 아쉬웠다. 세 에피의 모든 캐릭 중 제일 괜찮았던 연기가 톰(매튜 동생)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



벙커 트릴로지 - 아가멤논 리뷰(그 외)

벙커 트릴로지 - 아가멤논, 전쟁의 먹잇감

전쟁으로 부강해지는 나라는 없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한 쌍의 연인이 있다. 그들은 부부가 되고, 아기를 낳고,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
아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남편의 직업이 군인이 아니었다면, 참전하지 않았다면.

<벙커 트릴로지>의 원작은 영국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가나'와 '맥베스'는 영국군 참호를 배경으로 한다. 이와 달리 중간에 끼인 '아가멤논'은 유일하게 독일군의 이야기다.

이 3부작은 연합국, 즉 승리한 쪽에서 씌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양측 모두의 비극을 골고루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전쟁의 먹잇감은 어느 한 쪽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 서로 반대편에 서서 총을 겨누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닮은 모양새의 비극이 드러난다는 것,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아가멤논'이다.

'아가멤논'은 작은 무대 안에서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분리하고 공유한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사랑스러운 연인이 전쟁에 의해 망가져가는 과정과 파국을 맞는 결말을 매끄럽게 교차시키면서 보여준다.

독일 남자 알베르트와 영국 여자 크리스틴은 평화롭던 시절 독일의 어느 숲에서 처음 만난다. 알베르트의 망한 플러팅과 크리스틴의 철벽이 흥미진진한 장면이다. 알베르트는 크리스틴이 사슴을 쏘는 순간 사랑에 빠졌고, 크리스틴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여성 참정권이라는 말,
평생 입에 올려본 적은 있어요?

알베르트는 군인이지만 평화로운 일상 속에 사냥이나 다니고, 크리스틴은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다가 아버지에 의해 독일로 쫓겨났다. 알베르트는, 아마 처음엔 관심이나 좀 끌어보려고 한 의도였을지도 모르지만, 크리스틴에게 왜 운동을 시작했는지 물었고, 알베르트는 아더왕 전설 이야기를 하며 소통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 지점이 크리스틴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본다. 가족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고 쫓겨났던 크리스틴이다. 어쩌면, 가족들은 크리스틴이 왜 운동을 시작했는지 관심도 없었을 것이고, 에밀리 데이비슨의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크리스틴을 그저 예민한 별종으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난 에밀리 데이비슨의 죽음이 그저 왕의 말 엠머의 안락사를 아쉬워하는 뉴스로만 다뤄져야 할 일인지 생각했죠.
그러자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난 왜 투표를 할 수 없는지,
난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난 왜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지!

알베르트 역시 다른 남자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 역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러나 그게 알베르트 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심지어 기득권 층에 있는 그가 알아차리기란 어려웠을테니. 알베르트는 크리스틴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법 현명한 답을 돌려준다.

답은 바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는 인생.

알베르트의 이 대사는 마치 '난 당신을 다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나 그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 선택한 삶이라는 건 알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마 이 때 크리스틴은 알베르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게 아닐까. 가족들에게도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 이해하지는 못해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준 사람.

그리고 마법, 크리스틴이 처음 사슴을 쏘았던 탄피를 간직하고 그걸 품에서 끄집어내면서 '당신을 만난 것은 내게 마법이었다'고 말하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알베르트가 객관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참전 이전의 모습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누구도 전쟁을 예측하지 못했던 시절, 평화롭다 못해 무료한 나날. 두 사람의 밤산책 장면에 작게 퍼지는 벌레 우는 소리와 따뜻한 조명,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는 두 사람에게서 시원하고 맑은 숲의 공기와 정적, 평화가 느껴진다. 이어지는 비극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이 시간을 영원히 반복하며 둘을 그 안에 묶어두고 싶어진다.

극중에서 생략되어 있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전쟁 이전의 크리스틴은 나름대로 원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독일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독일에 남는 것, 알베르트와의 결혼, 임신 그 모든 건 크리스틴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이 모든 걸 집어삼킨다. 자유도, 남편도, 아기도, 삶도. 전쟁의 손길은 영웅으로 대우받는 알베르트와 불구자 요한에게도 공평하게 가 닿는다. 사람에게서 생기를 빨아들이고 잠을 빼앗는다. 공포와 불안을 주고 타인을 죽이게 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죽음에 몰아넣도록 인도한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늪에 빠지듯이 들어간 진득한 전쟁의 그림자는 서서히 사람을 삼키다가 알아차린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크리스틴, 나 군인이야.
난 이런 날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
당신, 정말 전쟁만 기다려온 사람 같아!

알베르트를 전장으로 이끈 것은 세뇌당한 애국심이다. 그는 군인이었고, 군대라는 조직에 속한 이상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훈련받고 만들어진 사람이다. 마치 '모르가나'에서 멀린이 아이들의 허황된 영웅심리를 자극해서 전쟁터로 이끌었듯이, 전쟁으로 한탕 해볼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이 국가적 목표가 되고 신념처럼 가장한 채 군인들을 움직인다.

알베르트는 참전 이전의 모습과 전쟁에서 망가진 모습을 짧은 간격으로 오고가는데, 눈빛과 자세, 목소리 톤 만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의 낙차는 전쟁의 잔혹함을 그대로 반영한다. 참전하기 전 그토록 생기있고 따뜻하고 열정적인, 잘 웃고 조금 엉뚱하고 사랑스럽던, 귀여운 눈웃음을 가진 그 사람은 전쟁을 겪으며 텅 빈 눈빛과 메마른 입술을 가진 껍데기만 남는다. 모든 걸 빨아들여버릴 것 같은 시커먼 결핍이 넘실거리는 눈동자는 삶과 죽음 그 어느 사이 쯤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변하기까지 처절하게 겪은 참상이 알베르트의 대사 하나하나에 고통스럽게 묻어있다.

알베르트는 잠을 잃어가며 고통을 집어삼킨다. 그 때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어설픈 총탄, 부상을 입은 채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데, 보기만 해도 내가 힘든 그 장면들은 알베르트 마음의 통증을 대변하는 것 같다. 잠 못이루는 고통 속에서 얼마나 버티기 힘들었을까. 전쟁터의 알베르트는 속으로 늘 그렇게 비명을 질러왔겠지. 술을 들이키면서 연락병에게 내뱉는 말들은 그 정체에 대한 힌트이기도 하지만 알베르트가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한 최선의 마인드 컨트롤이기도 했다.

승리가 중요해?
죽으면 승리가 다 무슨 소용이지?
전쟁에선 살아남는 게 승리다!
......
왜, 날 반역죄로 죽일 건가?
......
살아남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뜻이지.

입대 전 알베르트는 연락병과 똑같이 생각한다. 독일은 승리할 것이고 전쟁으로 부강해질 거라고. 그러나 직접 마주한 전쟁은 그렇지 않았다. 공포, 살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원초적인 공포.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참혹한 본능, 살인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비극. 어쩌면 이 모든 걸 마주하고나서 알베르트는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크리스틴의 편지를 읽지 못했을지도 몰라.

가져가.
오늘 그 가족들도 함께 죽었으니까.
적군을 죽인다는 건 그 가족들의 인생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의미하지.

그러나 알베르트는 자신의 가족이 죽어간다는 걸 몰랐다. 바보처럼. 크리스틴은 전쟁이 터진 이후 영국인인 것이 알려지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 이는 크리스틴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을 막는다. 전쟁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집에 있는 크리스틴에게서도 선택의 자유와 삶을 빼앗았다.

세 에피소드를 통틀어 가장 바라보기 힘든 장면은 역시 아가멤논에서 아기가 죽는 장면이다. 알베르트는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총을 겨누는데 총구의 방향은 편지를 쓰는 크리스틴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울리는 총성, 이어지는 아기 울음소리, 알베르트의 환청. 죽은 아기를 데리고 나타난 주정뱅이, 크리스틴의 절규, 알베르트의 공포, 알베르트의 자해, 크리스틴의 복수. 잠시도 끔찍하지 않은 순간이 없는 숨막히는 씬이다. 크리스틴이 알베르트를 길게 부르짖고 알베르트가 크리스틴을 향해 총을 쏘는 마무리까지도. 그 때 알베르트는 어쩌면 크리스틴의 큰오빠를 죽였을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적을 죽였으나 자신의 가족이 죽은 건 몰랐다. 아기가 죽었다는 것도, 크리스틴이 죽어간다는 것도. 좁은 공간 속에서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분리하고 동시에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한다.

아가멤논은 개인이 전쟁 속에서 겪는 고통과 그로 인해 변해가는 과정과 주변에 끼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풀어낸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알베르트의 자해와 알베르트, 크리스틴의 먹방 씬이다.

촛불을 켜고, 알베르트가 쭉정이같이 지친 얼굴로 팔뚝을 긋는다. 공연 후반으로 갈수록 칼을 쥘 힘도 없어 보여서 소름끼치지만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동시에 들리는 노크소리. 그리고 알베르트에게 칼을 겨누는 크리스틴. 분명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곳에 서 있는 둘은 결국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게 된다.

며칠은 굶은 사람들마냥 허겁지겁 게걸스럽게 고기와 과일을 입에 쑤셔넣는 둘의 눈은 텅 비어있다. 위장이 비어서 생긴 배고픔이 아니다. 영혼의 허기다. 전쟁이 알맹이를 빨아먹고 남은 껍데기가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비어버린 속을 채우려 한다. 무얼로 채울지 몰라서 음식을 쑤셔넣어 보지만 블랙홀처럼 시커멓게 죽어버린 마음이 채워지지는 않는다. 서로를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죽어있는 것 같기도 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전쟁 때문이지.
내 아이를 죽인 사람은 내가 죽였어요!
하지만 전쟁을 죽일 수는 없죠.

크리스틴은 단언컨데 세 에피소드의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현명하다. 모든 걸 알베르트 탓으로 돌리고 원망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때로 알베르트에 대한 질투로 그 상황을 이용하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한인데, 크리스틴은 모든 일의 원인이 알베르트가 아니라 전쟁임을 알았다. 요한은 그 사람이 있어야 당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정작 그가 있었다면 당신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모순적이다.

요한은 워낙 비중이 작기도 하고 아가멤논에 나머지 세 사람이 하도 강렬한 캐릭터라 잊혀지기가 쉬운데, 다시 보니 요한이 넷 중 제일 의뭉스러운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껍데기로만 보면 선량하고 유약해 보이지만모순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마치 독일인이지만 유대인 아버지를 둔, 극단적인 그 핏줄 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다.

요한은 크리스틴을 사랑하고, 알베르트와는 미적지근한 관계이며, 영국군의 첩자다. 그는 자기 입으로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첩자로 전쟁을 돕고 있었고, 크리스틴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독일군에 침투시커 스파이 짓을 시키다 못해 남편을 죽이라고 종용한다. 그리곤 자기와 같이 스위스에 가잰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보이는 건 요한의 삐뚤어진 열등감과 질투심과 욕망이다. 그 역시 전쟁을 빌미로 크리스틴을 얻어보려는 속셈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크리스틴이 요한을 단호하게 거절하는 장면이 난 참 좋더라. 보통의 진부한 아침드라마나 막장스토리나 보수적인 여캐였다면 분명 둘이 썸이 생길 것 같았는데 크리스틴이 그걸 제대로 막아줬어.

작전명, 아가멤논. 이거만 봐도 요한의 행동에 욕심이 없었다고는 못하겠다. 알베르트를 아가멤논, 크리스틴을 그 아내 클리템네스트라, 자신을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아이기스토스로 은유한 걸 보면 말이지.

알베르트가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뒤로부터 엔딩까지 이어지는 모든 장면은 전쟁이 둘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죽였는지를 보여준다. 빈틈없이 맞물리는 흐름 속에 오만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힘든 작품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결말로 인도한다.

돌아온 알베르트가 집을 둘러보는 장면부터 고요한 비극이 느껴진다. 대단히 낯선 물건을 보는 눈빛으로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디오를 멍하게 바라보고,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낡은 테이블을 쓱- 쓸어보는 그 손길. 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 비극이 담겨있다. 알베르트가 그간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기묘한 그리움과 낯설음, 기억도 안 나는 시절에 처박아둔 먼지 투성이 편지처럼, 그리고 동시에 이걸 낯설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슬픔. 대사 한 마디 없이 이를 표현해준다. 벙커라는 좁은 공간이었기에 가능했던 강렬한 감정 전달이다.

그리고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한 부부. 그러나, 서로에게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낯선 무언가를 발견한 부부.

내가 모르는 얼굴이네.
내가 모르는 얼굴...
내가 모르는 사람이 와 있어.
......
...당신도 그래.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 만났던 둘이다. 다치고 망가지고 모든 생기가 다 빠져나간 채 마주한 둘에게 서로의 모습의 낯설 수밖에. 그러나 크리스틴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당신, 다시 안 가면 안 돼? 하지만 알베르트의 죽어있던 눈빛은 갑자기 차갑게 확 타오르며 테이블을 부서질 듯 내리친다. 그 개새끼, 내가 반드시 찾아내서 사살시켜버릴거야. 그 때 크리스틴은 알베르트를 '아가멤논'으로 생각한다. 전쟁에 미쳐 딸을 제물로 바친 왕, 오로지 전쟁만을 사랑한 사람.

...그런 얘길 꼭 집에와서 해야겠어?
......
할 말이 없어, 이런 것 밖에.

알베르트는 집으로 돌아오고 크리스틴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소 자신이 변했음을, 망가졌음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자신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고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들은 빈약해지고 거칠어졌다. 저 짧은 대사 한 마디에 온갖 죄책감과 자괴감과 슬픔이 담겨있다.

아기 이름을 묻는 크리스틴과 답하지 못하는 알베르트. 알베르트를 보며 절망에 젖어가는 크리스틴과 잊고 있었던 아기의 존재를 상기하며 눈빛이 확 살아나는 알베르트의 대비가 비극성을 강조한다. 우리 아기 어딨어? 예전의 부드러운 눈빛이, 미소가 그라데이션처럼 얼굴에 아프게 번져간다. 죽어있던 사람이 갑자기 살아난 것만 같다.

용기가 없었어,
수십 명을 죽일 수는 있었어도 그 편지 뜯을 용기가 없었어.
당신이 그 날 처음 쐈던 탄피,
난, 내가 사냥개인 줄 알았는데
내가 사슴이었네.

알베르트는 칼에 찔리고 나서야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온다. 탄피 목걸이에 입을 맞추며 힘겹게 고백하는 알베르트는 다리 다친 사슴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터에서 죽어라 달렸다. 다친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어디선가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 영국군이 있는 것만 같다. 그들을 피해 달리고 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음밖에 남지 않는 걸 알면서도 불안과 공포 속에 달렸다. 죽어갔다. 크리스틴은 그제야 알베르트가 전쟁을 일으키고 이끄는 아가멤논이 아니라 공포에 잠긴 사슴이었음을 알게된다.

클리템네스트라, 당신이 할 일을 해.
그동안 너무 고단했어.
등을 대고 잠들어본 적이 없어.
고마워, 크리스틴. 사랑해.

크리스틴은 다시 한 번 총을 든다. 다친 사슴을 위해. 사슴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 사랑하기에 총을 겨누고, 사랑하기에 죽여야 하는 끔찍한 비극이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다. 베개를 머리 아래에 받쳐주며 크리스틴은 알베르트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제 내가 아는 얼굴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내 남편,
그 사람의 얼굴이에요.

전쟁으로 망가져버린 사람을 되돌리지 못한다. 죽음만이 그를 구원했다. 이것이 아가멤논의 비극이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초연에 없었던 엔딩이 추가됐다. 그리고 앞에서 간신히 버티던 흔들린 멘탈이 여기서 못 버티고 다 무너졌다. 바로, 처음 사람을 쏘았을 때의 알베르트. 공포를 경험하고, 자신을 잃어가고, 그를 숨기기 위해 자해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불안한 눈빛으로 떨면서 크리스틴을 부르고 탄피에 입을 맞추며 노래한다. 평화롭던 그 때 크리스틴이 불렀던 그 노래.

공포는 그런 게 아니야!
죽는 게 얼마나 쉬운 건지 깨닫는 순간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
전투도 아니고, 그저 밖을 정찰나가기 위해,
혹은 오줌을 싸기 위해 한 발 나갔을 뿐인데,
옆에 있는 동료에게 너무 춥다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푸슉-
돌아보면 쓰러져있는 건...
그 순간,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아, 나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내가 그걸 해주는 거다.

처절한 공포를 경험했던 첫 순간, 과거의 한 장면이기도 하지만 알베르트의 속에 늘 숨어있었던 진짜 진심, 휘파람을 불고 자해를 하며 숨겨오고 외면해온 나약한 모습. 알베르트는 훈련을 받은 군인이었지만 실제 전투는 처음이었다. 저격은 잘 해도 사람을 쏘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다. 그런 사람이 독일군 영웅이 되고 저격수를 잡기위해 감적수를 희생시키는 무자비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한 사람이 무너져가는 과정은 이렇게도 아프고 비극적이다.

아가멤논은 부부의 이야기지만 큰 틀에서는 전쟁 자체를 은유한다. 알베르트는 독일, 크리스틴은 영국. 연락병은 알베르트가 살아있는 한 독일은 승리한다, 고 했고 크리스틴(영국)은 알베르트(독일)를 죽인다. 실제로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아가멤논은 어느 한 쪽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고 양측이 똑같은 아픔을 공유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극단적으로 둘을 부부로 설정하여 국가를 넘어 인간 사이의 비극을 또렷하게 그려낸다.

커튼콜에서 알베르트가 탄피에 키스하며 크리스틴을 보고 웃어줄 때 왜 그리 슬픈지. 그제서야 웃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크리스틴, 고마워. 사랑해.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은 그 눈빛.

개인적인 아가멤논 최고의 조합은 이진희 김바다 신성민. 물론 모르가나와 마찬가지로 나머지가 절대 나쁜 건 아니다.

본진이 제일 많이 나온 에피이기도 하고 연기가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알베르트 이 개ㅈ... 하다가도 타는 쓰레기로(...) 분류하곤 했다. 크리스틴 너무 사랑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어린애처럼 안쓰럽고 이 모든 걸 다 보여준 본진 사랑해. 너무 힘들었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알베르트. 총 맞는 그 순간까지 탄피 꽉 쥐고 입맞추고 있다가 죽어서도 탄피 못 놓는 거 너무 가슴아팠고.

이진희 크리스틴은 모든 장면들이 좋았으나 특히 아기 죽었을 때와 사과 먹는 장면이 정말 좋았다. 비명처럼 흘러나오는 울음과 아픈 눈빛. 알베르트 칼로 찌르고 지혈해줄 것처럼 눌러주거나 총 겨누다가 힘풀리는 그런것들 너무 사랑했어. 정연 크리스틴도 순간순간 가슴을 쥐어뜯을 때가 있었다. 잘 자, 여보. 마지막까지 알베르트를 보고 웃으려고 애쓰던 모습.

연락병은 어리숙한 모습에서 쎄한 모습까지 잘 표현해야 하는데, 둘 다 너무 잘했다. 굳이 김바다가 더 좋았던 거라면 아기 죽인 그놈(...) 연기까지도 워낙에 좋았기 때문.

요한은 신성민이 크리스틴에 대한 애정과 다가가기 힘든 소심함, 그리고 알베르트에 대한 한 줄기 연민까지 잘 표현해줬다. 박은석은 어쩐지 사랑보다는 질투와 욕망이 더 커보였으나 그만큼 입체적이었다.





벙커 트릴로지 - 모르가나 리뷰(그 외)

벙커 트릴로지 - 모르가나, 전쟁의 첫 번째 피해자

자신이 원하는대로 모습을 막 바꾸는 마녀의 등장이라!
이거이거, 아더왕과 기사들의 전설이 완성되려나본데?
원래 모르가나가 기사들을 막 홀렸다가 도왔다가 그러잖아!

여기, 모험을 떠난 1명의 훌륭한 왕과 그를 따르는 12명의 위대한 기사가 있다.
-
아니, 다 함께 참전한 13명의 친구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지금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거친 산을 잠시 등반한다는 생각으로 군가를 부르며 즐겁게 길을 나섰다. 훈장을 받고 당당히 돌아와 따뜻한 집에서 성탄을 보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멀린'으로 불리는 교장의 말은 어린 아이들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달콤한 속임수였다. 전쟁의 현실 속에서, 반복되는 죽음과 절망을 겪으며 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벙커 트릴로지의 세 개 에피소드 중 첫 번째, <모르가나>는 '전쟁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는,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르는', '살면서 이런 경험을 처음 해보는' 어린애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세 개의 에피소드 중에서도 유독 마음이 힘들고 감정을 많이 흔들어놓는 이야기다. 동시에 가장 은유적인 표현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 쉬운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모르가나에 악역은 없다. 가해자가 없다. 실체가 없는 가해자는, 그러나 무수한 피해자들 만든다. 가해자 없이 모인 피해자들은 그리하여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가웨인의 헛소리에 예민해져서 그를 몰아세우는 랜슬롯이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친 가레스 곁에 가웨인을 혼자 두고 도망친 아더를 비난할 수 있을까, 가레스를 베게로 눌러버리고 친구들에게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 호소하다 못해 폭발해버리는 가웨인을 욕할 수 있을까.

아니.

모두 옳은 행동은 아니지만 이들은 진짜 가해자가 아니다. 그저 모두 피해자이고, 그래서 하나하나가 다 이해되고, 가슴 시리게 안쓰럽다. 모르가나를 보고 나오면 심장이 아픈 이유다.

가레스. 가장 큰 상처이자 트라우마이고 모든 엇갈림의 시작. 가웨인은 충격으로 스스로 기억을 잊었고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극중에서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랜슬롯이 희망을 잃고 약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때의 왕은, 아더는, 그 초라한 왕관을 쓴 채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서우면 소리 질러도 돼!
어차피 아무도 못 들어!
아침에는 뭐했는가, 솔져!
......
우린 이 참호 밖을 나간다.
반드시! 살아서 여길 나갈 것이다.
지금부터 그 생각만 하면 돼, 알았어?

아더의 비극은 그가 아더여야 했기 때문에 생겼다. 왕이어야 했다. 기사들이 충성을 바치는 만큼 그들을 이끌어줘야 했고 버팀목이 되어줘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더 역시 동년배의 꼬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더는 세 사람 중 가장 질기게 전설 속 그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자신은 왕이고, 호수의 기사 랜슬롯, 녹색의 기사 가웨인과 함께 전쟁을 물리치고 이 참호를 나갈 것이라고 스스로를, 기사들을 속이고 다독인다. 이미 무너져버린 불안정한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그것이 아더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으니.

지난 번 전투에서 만 오천 명이 넘게 죽었대.
애들 군번줄 싹 다 모아다가 내년 성탄 트리에 걸어놔야겠어.
......
너니까, 왕이니까!
이 고난에 빠진 기사들은 당신의 검 끝만 바라보고 있나이다, 폐하.

랜슬롯은 의외로 셋 중 가장 현실에 가까이 있다.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상황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역설적으로 환각을 보여주는 약물에 빠지고 환상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모습은 모르핀을 맞고 나서 정신이 흐린 와중에만 드러난다. 평소에는 그냥 원래 그대로의 랜슬롯이다. 그 차이를 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랜슬롯도 속이 말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더와 랜슬롯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 애쓰는 건 가웨인 때문이다.

가레스 사건을 가감없이 기억하고 있는 아더와 랜슬롯에게 기억을 잊고 미쳐가는 가웨인의 모습은 차마 견디기 힘든 비극이었을 것이다. 열 셋 중 고작 셋이 남았는데, 셋 중 하나가 미쳐간다. 그래서 둘은 더 가웨인을 평소처럼 대하려 했을 것이다. 장난도 치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묻어버리려 하고, 화도 내보고, 설득해보고, 달래기도 하면서. 그러다보면 갑자기 가웨인이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포탄 소리야.
포탄 소리라고, 가웨인!
대답해, 가웨인.
대답해야 해!

아더가 처음으로 가웨인에게 소리치는 장면은 아더도 한계에 부닥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가웨인을 응시하는 랜슬롯의 간절하면서도 지친 얼굴이 절박하게 말한다. 대답해, 가웨인. 제발, 아니라고 말해. 차라리 질 나쁜 농담이었다고 해줘. 하지만 가웨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친구들의 반응이 자신을 부정하려는 것으로만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모르가나를 만나는 건 랜슬롯이다. 랜슬롯의 모르가나는 그웬, 정확히는 자신을 사랑하는 그웬.

편지 해.
편지보다... 내가 먼저 돌아올걸.
그래도, 편지 해. 약속해.
응... 편지 할게. 편지보다 먼저 올게...

그렇기에 랜슬롯은 셋 중 유일하게 무대 위의 모든 '모르가나'를 본다. 눈을 떼지 못하고 응시하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이 환상임을 인지하고 있다. 극중에서 직접적으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는 않는데, 배경음악과 조명으로 적절하게 표현된다. 휘파람 소리를 닮은 신비하고 느긋한 음악과 함께 푸른 조명이 켜지면 이는 명백한 환상이다. 오렌지빛의 조명은 기억의 한 조각이다. 그리고 랜슬롯이 보는 모든 환상과 회상은 현실이 아닌 조명 속에서 펼쳐진다. 이 장면들은 머릿속에서, 혹은 모르핀이 선물한 환각 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며, 랜슬롯은 그로 인해 행복과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두 번째로 모르가나를 만나는 건 가웨인이다. 가웨인의 모르가나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하는 프랑스 여자다. 아더와 랜슬롯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웨인은 자신을 그대로 들어줄 이가 필요했다.

당신은, 나를, 들어요.
경청하는 거요.
그거 정말 너그러운 행동이에요.
......
당신이 내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여기, 내가 존재하는 느낌을 받아요.
이해해요?

그러나 가웨인의 환상은 랜슬롯의 환상과 다르게 그려진다. 조명을 받지 않고, 현실의 모습 그대로 나타난다. 아마도 가웨인은 자신이 보는 것이 환상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현실이라 믿었기 때문이리라. 어느 새 누구도 부르지 않게 된 그 노래를 그리워했던 가웨인에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고, 엄마 베게를 그리워하는 그에게 무릎을 빌려주고,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준다. 가웨인에게 꼭 필요한 모습, 필요한 존재 그대로.

모르가나는 중후반부터 슬픈 장면이 쉴 새도 없이 휘몰아친다. 가웨인이 죽은 친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읊조리는 것이 그 시작이다. 눈물은 범벅이면서 어투는 평범하다. 너무 슬프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대사의 비극성이 극적으로 다가온다. 아이들이 죽은 이유는 정말 사소하고 어처구니없다. 진흙탕에 빠진 부츠를 빼려다가, 무서워서 돌아오다가, 제일 먼저 달려나갔다가... 그래, 차라리 독일군과 맞붙어서 싸우다가 사망한 것이라면 좀 낫다. 그러나 전쟁이 뭔지 모르고 죽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아이들은 전쟁다운 전쟁이 뭔지도 모른 채, 어쩌면 자기가 왜 죽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자기가 죽어가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이 아이들은 그저 소모품이었다. 적의 총알을 하나 줄여주는데 쓰이는 소모품.

예전엔 친구들이 죽으면 기도를 했어요.
근데 이젠 안 해요...
신도 이렇게 많은 기도를 들어줄 수는 없을테니까요.

전쟁은 이렇게 무지한 순수함을 가장 먼저 피해자로 삼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어른은 천천히 기침하다가 잠든 상태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 이 모순적인 평화가 얼마나 끔찍한가.

모르가나는 레미제라블, 더 헬멧의 감성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저 아이들이 무사히 집에 돌아가서, 학교도 졸업하고, 평범하게 살다가 어른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또한 랜슬롯은 에포닌을 연상시킨다. 나 홀로 너와 함께 한 상상, 너 없이 함께 맞이한 아침, 알아요 모두 나의 상상, 나 홀로 말해 너는 못 들어.

이어지는 랜슬롯과 가웨인의 엇갈림. 여기에서 아더가 이 불안정한 구조를 목숨걸고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더는 가웨인을 놀리는 랜슬롯에게 그랬듯 랜슬롯의 비밀을 까발리는 가웨인을 거칠게 막는다. 어쩌면 아더는 이미 랜슬롯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걸 풀어서 공론화하는 순간 왕과 기사라는 환상이 산산조각난다는 걸 너무 잘 알았기에 묵인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걸 깨려는 가웨인을 저지하고 흥분한 랜슬롯을 온몸으로 막는다.

초연 때는 이 장면이 랜슬롯이 잘못한 만큼 당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번엔 어쩐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기분이다. 랜슬롯이 진심으로 꼭지돌아서 화내는 유일한 장면, 가웨인을 괴롭히긴 했어도 툭툭 건드리는 수준이었는데 가웨인은 제대로 역린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였다. 외려 가웨인이 몰아부치며 잔혹하게 물어뜯는 걸로 보인다. 조금쯤은 가웨인이 원망스러울만큼. 뭐... 랜스가 본진이라 그런거라고 해도 반박은 못하겠다...

가레스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였지만, 아더와 랜슬롯은 여기에서 가웨인에게 부채가 생긴다. 그를 혼자 버려두고 나갔다는, 그 비극을 홀로 감당하도록 내버려뒀다는 부채. 그러나, 똑같이 어린애였던 둘도 그저 무서웠을 뿐이다. 겁이나서 도망쳤다. 그런 둘을 비난할 수는 없다.

이후 랜슬롯과 아더는 처음으로 마음의 곪은 상처를 내놓는다. 랜슬롯은 자신이 아더의 연인을 몰래 사랑하고 있으며 그웬과 함께하는 상상으로 겨우 버티고 있음을 고백한다. 아더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지독한 무력함과 절망을 토해낸다.

아더, 내가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난 매일 내가 사랑받는 상상을 해.
......
난 이제 내 머릿속에 한없이 행복한 거짓 환상이 가득 채워져야만 잠을 잘 수 있게 됐어.
갑자기 그웬이 나한테 넘어오는 상상,
그웬이 나에게만 휘파람을 불어주는 상상,
하지만 빌어먹을 상상일 뿐이라는 거야.
가웨인 말이 맞아.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건 아더왕 전설에 나오는 귀네비어 왕비지 그웬이 아니야.
그 사람 없어.

랜슬롯의 환상은 이 고백과 함께 한 차례 부서진다. 랜슬롯의 고백을 들으며 아픈 마음을 숨긴 아더의 조각난 표정은 또한 분노를 넘어선 유대와 우정을 담고 있어서 더 가슴아픈 장면이다.

여기선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아무리 그웬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웬이 아무리 날 사랑한다고 해도,
이 빌어먹을 참호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

아더는 환상에 기대는 것이 의미없는 일이라고 말하며 환상을 깨뜨리고 절망을 준다. 하지만, 곧 이어 모르가나가 환상과 마법을 긍정하면서 생각지 못한 위로를 준다. 환상을 꿈꾸어도 좋다고 말해주는 부분이 참 좋다. 특히 발음이 갑자기 명료해지는 모르가나의 목소리가 정말 마법에 걸린 듯한 느낌을 선물한다.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하고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마법을 선사하는 모르가나가 이끄는 안식이 결국 죽음이라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다. 죽음 외엔 쉬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당신 집 위로 떠오르는 태양,
함께 보는 바다,
그건 다 마법이에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
당신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건 다 마법이에요.

이 때, 처음으로 가웨인은 랜슬롯처럼 푸른 환상 조명 아래에서 모르가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존재가 환상임을 인지한다. 그러나 가웨인에게 그건 중요치 않았다. 현실보다 달콤한 환상이란 이리도 빠져들기 쉬운 유혹이다. 그 길이 죽음을 향한다 해도.

마법에 기대어 겨우 버텨오던 랜슬롯과 아더가 끝내 무너지는 건 가웨인의 죽음 이후다. 아더는 스스로 붙들고 있던 환상의 끈을 놓아버렸다. 자신은 왕이 아니고, 너도 기사가 아니라면서 랜슬롯의 본명을 부른다.

난 왕이 아니야!
너도 기사가 아니야!
우린 그 어떤 영웅도 전설도 아니야!
축복도 마법도 이제 다 끝났어.

그 때 아더의 세계는 무너지고 랜슬롯의 환상은 두 번째로 깨진다. 그렇기에 랜슬롯은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었다. 희망이 사라진 까닭이다. 모든 거짓 환상 꺼풀을 벗고 목도한 진실은 처참하다. 자신은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며 물 밖에서 숨을 까딱까딱 쉬고 있는 물고기다. 그리고 사령부는 언제든 자신을 기관총의 먹이로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고, 그렇게 죽어버린 시신은 물 위로 떠오르며 비극을 토해내지도 못할 것이다.

눈앞에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다. 차이라면, 하루 쯤 더 사냐, 더 빨리 죽냐일 뿐. 그 상황을 랜슬롯은 끝내 버티지 못했다. 모르핀을 맞고 정신을 살짝 놓은 채로 맞이한 절망은 그를 쉽게도 죽음으로 이끈다. 살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는데, 죽는 건 너무도 빠르고 쉬웠다.

그냥, 가보기만 할게... 그러나 랜슬롯의 눈은 이미 죽어있다. 절망과 슬픔에 잠겨 살아도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상태.

그 후 아더의 '모르가나'가 나타난다. 극중에서 가장 늦게 모르가나를 만난다. 끝까지 곁을 지켰던 두 친구의 모습을 입고, 함께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부르며,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불러온다. 그렇기에 홀로 남은 왕은 울부짖는다. 모두가 잊은, 심지어 자신들조차 잊은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마지막 클리포드, 가웨인의 이름은 유독 죄책감이 짙게 묻어있다. 무리 중 가장 어린 막내, 눈이 나빠서 못 간다고 주저하던 아이, 시력판 다 외우라고 하면서 전쟁터로 이끈 장본인, 아더. 가웨인이 그에게 얼마나 아픈 손가락이었을까.
프레드 (갤러해드)
가레스 (가레스)
윌리엄 (랜슬롯)
......
클리포드! (가웨인)

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배우들의 해석이 약간 달랐다는 걸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박은석 아더의 연기였고, 신성민 아더는 꽤 처음부터 모르가나를 본다. 가웨인처럼 휘파람 소리를 듣고, 랜슬롯처럼 그게 환상임을 안다. 그러나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고백하지 못한다. 그는 왕이었고, 왕이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절망이 굉장히 크게 느껴지던 아더였다.

난생 처음 겪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어린 소년병들이 현실에서 쉴 곳은 없었다. 비가 오면 물이 차는 진흙탕 참호와 언제 저격수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를 참호 밖, 밤낮으로 들려오는 포탄 소리와 정찰기 소리, 잠들지 못하는 밤, 참호를 뒤흔드는 굉음과 진동, 무너져가는 모래.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은 죽어가는 친구들과 미쳐가는 친구들과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들의 무력함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장 안전하고도 불안정한 은신처를 찾아냈다. 바로, 상상이다. 환상에 몸을 맡기고 상상 속에서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열 세 명이었던 친구들은 세 명으로 줄었다. 그들이 각자 선택한 환상 역시 달랐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며 나타나는 그 존재에게 '모르가나' 보다 더 어울릴 이름이 있을까.

아이들을 전쟁에서 버티게 하고 잠들게 하고 다시 깨어나게 했던 마녀, 끝내 죽음의 안식으로 인도하는 위험한 여신, 그러니 모르가나다.


솔져1 외에 전캐를 찍었고, 개인적으로 모르가나 최고의 조합은 박은석 강승호 정연.

그렇다고 나머지가 절대 별로인 건 아니고. 솔직히 솔져3은 김바다가 전체적으로 연기나 감정흐름이 훨씬 정돈되어 있었고 깔끔했지만 강승호가 뭐랄까, 살짝 정신놓고 아무말 하는 어린애, 라는 이미지에 너무 찰떡이었다. 솔져2의 신성민은 가장 절망적이고 무력한 모습을 보여줬고, 솔져4는 최고의 조합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둘다 너무 좋아서.

굳이 저 배우들을 꼽은 이유라면, 박은석이 그리는 유약하고 물렁해터진 아더와, 박민성의 여리고 정 많은 랜슬롯과, 단단하지만 너무 어렸던 강승호 가웨인이 감정적으로 파장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더해서, 정연의 다층적인 그웬 연기와 소름돋는 환상의 표현이 극을 풍성하게 했다.

박민성이 랜슬롯을 초연 배우들과 상당히 다르게 연기했는데, 표현이 거칠고 쎈 척하지만 셋 중 가장 마음 약한 인물로 그려내면서 랜슬롯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갖고 있는 거부감을 상당히 많이 덜어냈다. 초연 때 두 랜슬롯 전부 무섭고 싫었는데 성랜스 귀여워... 그웬을 사랑하지만 아더에게서 빼앗을 생각은 못하는, 가웨인을 괴롭히지만 그가 진짜 잘못되면 누구보다 힘들어할 랜슬롯이었다. 욱하는 성질머리에다 예의라곤 팔아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더 말 잘 듣고 가웨인을 아끼고 귀여워한다. 그리고 그웬에 대한 사랑과 환상을 고백할 때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는 모습에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게다가 약 맞은 연기는 쓸데있게 왜 이리 잘하는 거야. 마약 신고할 뻔 했네(?). 앞머리 내리니까 되게 어려보이고 귀엽고 잘생겼고 루돌프 찾아와~ 하면서 손가락 까딱할 때는 이게 바로 "2+2는 귀요미♡" 의 좋은 사례였던 것이다...는 백프로 사심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아더는 왜 하필 13명 중 그가 왕이 되었는지 이유가 저마다 다른데, 박은석은 유약하지만 가장 포용력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왕이 된 아더였다. 성격도 성향도 제각각인 무리를 모두 품어줄 수 있는 너른 성품의 소유자다. 그래서 유독 박은석의 아더를 볼 때면 유대가 느껴지고 어떤 것보다도 우정이 앞서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랜슬롯이 치라고 할 때 자신이 말하는 그 모든 이유보다 앞서 랜슬롯을 정말 마음을 다해 아끼기 때문에 때릴 수 없는 왕이다. 가웨인의 상태를 모른척 하다가도 어느 새 다가와 다친 곳은 없는지 챙겨주는 다정한 왕이다. 그러나 동시에 속이 여물지 못하고 연약한 어린애다.  어쩌면, 그의 기사들이 그에게 그러했듯이 왕도 기사에게 의지하고 기대고 있었다. 특히 랜슬롯에게. 그래서 무너져가는 모습에 개연성을 더한다.

강승호는 배우가 어려서 그런지 외모의 영향인지 가만히 있어도 철없는 소년병의 이미지가 저절로 나온다. 여기에 약간 횡설수설하는 듯한 말투가 섞이면서 딱 귀찮은 정도의, 귀여운 캐릭터가 나타난다. 슬픔을 잊은 사람마냥 가볍게 내뱉는 대사는 유달리 무겁게 가슴에 떨어지곤 한다. 감정적이고, 어리숙하고, 어리다. 그러나 실상 세 남자들 중 속이 제일 단단하고 충실한 사람이다. 빛을 볼 기회가 영영 없었을 뿐. 가레스 사건 이후에 손바닥에 침 뱉어서 뜨거워질만큼 벅벅 문질러대는 이상행동이 안쓰럽고, 폭발하듯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폭력성은 가웨인의 내면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걸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김바다는 가레스 사건 이후 호흡곤란이 오면서 보는 사람이 아파질 만큼 가슴을 퉁퉁 내리친다.

정연의 모르가나/그웬은 정말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아더와 함께 하는 '진짜' 그웬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생동감있는 소녀였는데 랜슬롯 머릿속의 '환상' 그웬은 어쩐지 뻣뻣하다. 마치 누군가가 불완전하게 상상해낸 존재를 그대로 표현하듯이, 랜슬롯의 빈약한 상상 속 막연한 존재의 현신이었다. 가웨인에게는 정말 현실에 있는 프랑스 여자같은 얼굴로 나타나서 그의 말도 안되는 행동들에 반응해준다. 이런 섬세한 차이들이 모르가나를 한층 풍부하게 만들어줬고, 압권은 커튼콜이었다. 퇴장 전에 기둥에 걸린 군번줄을 촤라락 건드리며 나가는 모습이 그들 모두를 지배한 여신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진희는 세상과 한 발짝 떨어진, 조금은 무섭고 두려운 모습으로 세 사람 사이를 맴돈다. 좀 귀신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모르가나가 환상이며 죽음으로 이끄는 매개가 된다는 걸 잘 표현해준다.

후기를 너무 우울하게 썼는데, 사실 웃기고 재밌는 장면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써보는 모르가나의 인상적인 순간들.

가웨인이 여자 찾으러 간다고 할 때 '안 돼!' 하고 동기화되는 랜슬롯과 아더,
박은석 아더의 랜스 3종 - 래엔스 (저친구가 또^^;) - 랜스! (적당히 하자~) - 랜슬롯! (야 이 새끼가)
산타를 안 믿는 건 가웨인이 아니야! (성랜스 대극장 발성에 벙커 터짐) - 뭐래 (정색)
귀여움을 강조하는 아더 (박은석)의 귀여움,
기사는 자기보다 아래라고 강조하는 아더 (신성민)의 귀여움,
기사가 뭔지 설명하는 가웨인의 귀여움과 어설픔과 하찮음,
기사 설명 들으면서 한숨쉬고 이게 뭐람? 하는 모르가나(정연),
그건 다 마법이에요... 소름끼치는 순간,
뛰쳐나가는 랜슬롯의 옷소매를 끝까지 붙잡던 아더,
환상 속 랜슬롯이 아더를 보던 따뜻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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