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 트릴로지 - 맥베스, 전쟁의 끝
존경받는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대가 있다. 전쟁의 끝을 앞두고 즐겁게 연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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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총살형을 각오한 병사 셋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의 끝에서 장군을 처형하기 위해 연극을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맥베스'는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승리한 측인 영국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전쟁의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같은 듯 다른 듯 각자 흘러가던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시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맥베스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관객을 병사5의 역할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영국군 신병으로 마크 장군님께 경례도 해야하고, 독가스에 죽은 병사들, 병동의 아픈 병사들, 마크 장군의 죽음에 동조한 병사들, 그리고 전쟁의 증인이라는 역할을 받는다. 거기에 더해서 연극 중에는 맥베스 왕의 연회에 초대된 손님이자 말콤 왕자를 따르는 버넘 숲의 병사 역할도 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 경례하고 군번줄 흔드는 것 뿐이지만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나도 모르게 작품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모르가나나 아가멤논은 사실 아더왕 전설이나 그리스 신화를 아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데, 맥베스 만큼은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알고 있을 때 소름끼치는 느낌이 몇 배로 다가온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20세기 영국군 참호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연극을 시작할 때 종전을 앞둔 상황과 달리 참호 안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전쟁의 끝을 앞두고 기뻐할 법 하지만 배우들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굳어있고 긴장으로 뻣뻣하다. 이는 분명 세 사람이 각오한 결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맥베스'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시점은 마크 장군이 아직 중위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마크와 벤은 불합리한 상부의 작전에 분노하고 병사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드물게 훌륭한 장교였다. 아마 매튜나 제임스같은 병사들이 밝은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이들 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크는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쟁의 광기가 강해지면서 더 비인간적이고 말도 안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홍차는 그 은유적인 객체로 등장한다.
홍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밝은 조명과 아름다운 음악, 예쁜 찻잔, 따뜻한 적갈색 액체, 피어오르는 향, 우유를 넣으면 하얗게 번지는 모양새, 함께 즐기는 달콤한 디저트, 느긋한 여유, 평화, 고상함. 이 모든 건 전쟁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같은 전선 안에서도 누군가는 그걸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투표를 했다면 마크가 장군이 됐을 거라는 둥, 공화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겉으로 유하고 물렁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벤이지만 사실 가장 단단하고 굳센데다가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벤이 살아남았다면(ㅠㅠㅠ) 책을 썼을 것이고 전쟁을 막으려 노력하고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 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개인적으로 맥베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남아있는 것이 이 때의 벤의 선언이다. 괜찮은 척 하지만 사실은 잠 못 이루고 힘들어하던 사람, 책 속으로 도망치며 겨우 버텨온 시간들, 그리고 그 끝에서 얻은 교훈. 안경 너머의 눈빛과 책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제스쳐, 글자 하나하나에 묵직하게 실린 감정이 가슴에 훅 밀려들어온다. 자신이 지독하게 겪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마크의 승진 소식. 여기서 '코더 대대를 이끌게 되었다' 고 소개하는데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코더의 영주가 된다'는 것과 연결된다. 벤은 반쯤 장난으로 경례를 붙이는데, 여기서 마크 역의 배우들의 표현이 다른 게 재밌었다. 박은석은 화들짝 손사래 치면서 아우, 그런 거 하지 마~ 민망해 한다면 그 대사 신성민은 안 했다. 왠지 좀 즐기는 것 같았어.
갑자기 독가스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마크는 매튜에게 자신의 방독면을 씌워준다. 단순히 연락하려고 온 그에게 나눠줄 여분이 없는 상황에서 목숨 걸고 부하를 먼저 챙긴 거다. 정작 자신은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버티면서. 마크가 부대 내 가장 훌륭한 장교로 꼽힌 것도 능력 뿐만 아니라 이런 성품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독가스의 중독되며 맥베스의 마녀의 예언 장면이 겹쳐진다.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이며,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그 예언은 극중 맥베스를 파멸로 이끄는 예언이기도 했고, 현실에선 독가스에 정신을 잃은 마크의 꿈 또는 환각이기도 했다.
벤과 릴리의 이 대사는 마녀들의 예언처럼 마크에게 전해진다. 예언이라기보다 그저 바램이지만, 결국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맥베스는 초반에 꽤 가벼운 장면들이 많다. 마크와 벤의 이야기, 병원에서 마크와 릴리가 보여주는 미묘한 긴장과 둘을 놀리는 듯 아닌 듯한 매튜. 그러나 배경이 영국군 참호를 벗어나 '연극 맥베스'가 되는 순간 긴장감은 크게 높아진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와 벤쿠오의 반응은 이다지도 달랐다. 글래미스의 영주에서 코더의 영주가 되며 예언을 이룬 맥베스와 그를 따르면서도 경계하는 벤쿠오의 관계는 마크와 벤을 그대로 닮아있다. 벤 또한 마크의 승진을 예상하긴 했지만 곧바로 소령이 될 줄은 몰랐고, 그 점에 대해 축하와 동시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벤쿠오의 심정을 읽은 듯이 말을 돌리는 맥베스 역시 이미 벤쿠오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연극 맥베스와 영국군의 현실이 가장 절묘하게 맞물리는 순간은 편지와 던컨왕의 죽음이다.
마크가 릴리에게 준 편지가 맥베스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되고, 드레이크 장군의 죽음이 던컨 왕의 죽음으로 은유되는 순간, 그 연결이 짜릿하게 그려진다.
언제 들어도 늘 무서운 레이디 맥베스의 기도에 이어, 마크가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마크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장군이 돌아가면 자신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당할테니. 잘못이라고는 그저 작전이 필요하다고 말 한 마디 한 것 뿐인데, 희생이 작전이라는 개소리에 반박한 것 뿐인데. 분명 드레이크 장군은 쓰레기였고, 마크는 어쩌면 그를 살해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벤...
그 때부터 맥베스는 잠들지 못하는 날을 보낸다. 피로 물든 손을 닦으며 악몽에 시달리고 후회를 거듭하기 시작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나약해지는 맥베스를 더 진득한 광기로 이끈다. 빨간색 레이저가 핏빛처럼 손을 적시고 달아날 곳 없는 끝으로 둘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한 마크와 릴리도 잠들지 못하고 시달리게 된다.
마지막 말은 벤이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크의 살인을 함구하자, 입을 다물자. 진실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이 그토록 곧은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그러나 벤은 아직 마크를 믿고 있었다.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처음의 허물없는 모습이 아니다.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마크와 왠지 거리를 두고 어색해하는 벤, 둘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는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벤쿠오를 경계하는 모습과 그대로 연결된다.
벤이 외출 나가기 전 '읽어봐' 라고 말하는 듯 찍어준 페이지에는 마크의 두려움을 꿰뚫는 구절이 씌여있다. 마크는 친구인 벤의 고결한 성품을 잘 알았고, 그가 진실을 알까 두려워했다. 벤의 성격 상 진실을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마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읽던 책을 쾅 내리치면서 발성 싹 바뀌고 '맥베스'로 연결되는 연출이 정말 좋았다.
분명 시작할 때는 레이디 맥베스가 맥베스를 이끌어 왕을 죽이고자 했는데, 이 시점에서 주체가 달라진다.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깨기 위해 부자를 동시에 죽이려 계략을 세우는 맥베스와 그 모습에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보이는 레이디 맥베스가 있다. 이는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릴리의 감정과도 연결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매튜와 제임스가 마크 장군 방을 만드는 장면인데, 전체 에피소드 중에 유일하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곳이다. 긴장을 좀 풀고 가라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매튜의 동생 톰이 상병으로 진급했다는 얘기를 기본으로 각종 애드립의 향연이 펼쳐졌다. 박민성과 강승호가 만났을 때 제일 재밌었다. 둘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하찮은 덤앤더머가 되서 서로 귀여워하고 디스하고, 매우 흥미진진했다. 언젠가부터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던 씬이다. 다음에 매튜가 장군 흉내 내는 것도 워낙 하찮고 웃겨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게 좋았고, 마크 들어오면서 공기가 확 식는 그 느낌마저도 좋았다.
장군이 된 마크가 들어오면서 공기는 달라진다. 여기서도 배우들마다 변해가는 포인트가 다른 것이 재미있었다. 박은석은 이미 방에 들어올 때부터 살짝 맛이 가기 시작했고, 신성민은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만 해도 원래의 마크 테일러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매튜가 장군 흉내 내는 걸 보고 장난스레 동조해주다가 괜찮다고 웃어주는 장군이었다.
매튜가 보여주는 마크에 대한 무한 신뢰는 마크가 훌륭한 장군이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맥베스의 불안이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예언 때문이었다면 마크의 불안은 임시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누군가 자신의 살인을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바그너와 홍차. 그 때부터 마크는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다. 누가 그걸 뿌리칠 수 있을까.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주어졌다. 남의 것이기에 쳐다볼 생각조차 않던 것들이 손에 떨어졌다. 이 달콤한 유혹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마크 테일러 중위는 '전쟁터에 있던' 장교였고 존경받는 상관이었다. 그러나 마크 테일러 장군은 '전쟁터에 없는' 장군이 되어버린다. 처음엔 자신은 다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드레이크 장군처럼 그렇게 아무나 쉽게 희생시키고 작전없이 무모하게 굴지 않을 거라고. 자신은 분명 더 나을 거라고 자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같아졌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벤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마크를 찾아간다. 한 때 동고동락했던 전우, 믿을 수 있었던 친구.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맞붙는 이 장면은 맥베스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장면 중 하나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벤과 그를 짓누르려는 마크의 기세가 날카롭게 부딪힌다. 마크가 벤의 기를 누르려고 보이는 행동도 배우마다 달랐는데, 신성민은 지휘봉을 테이블에 세게 내리치면서 공기를 확 식게 만들다가 벤이 팔을 붙잡으니 놓을 때까지 노려보고 어깨에 대고 피아노 치면서 여유를 부리다가 하며 사람을 쥐락펴락 했다. 빈정대는 듯한 서늘한 눈빛이 아주 일품이었다. 박은석은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잡힌 팔을 탁 쳐내고 멱살잡아 돌려 세워져있던 옷깃 촥촥 접어주는데 세상 그렇게 재수없을 수가 없었다.
벤은 그 순간까지도 희망을 갖고 있었다. 분명 편지 얘기는 그를 마지막으로 떠보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테이블 위의 작전지도, 그 위의 동그란 찻잔자국. 벤의 손끝이 찻잔 자국을 꾹 누르듯이 덧그리고 눈빛에 슬픔이 들어찬다. 변해버린 친구를 향한 안타까움과 단호한 결심.
자신을 거침없이 쏘고 품에서 편지부터 찾는 마크를 보는 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마크, 마크,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건, 탕-. 숨통을 끊어놓는 총소리 뿐이다. 벤 중위의 죽음은 그대로 벤쿠오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벤이 마크에게 이야기하면서 쓰고있던 안경을 벗는데, 앞서 잠깐 나온 벤쿠오가 안경을 안 쓰는 덕분에, 죽은 벤은 그대로 벤쿠오의 유령이 되어 맥베스의 연회에 나타난다. 맥베스의 악몽에 벤쿠오가 있었듯이, 마크의 악몽에는 벤이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맥베스를 향한 벤쿠오의 원망은 마크를 향한 벤의 질책이기도 했다.
던컨과 벤쿠오를 연이어 살해한 맥베스는 맥더프의 가족들까지 살해하며 돌아올 수 없는 광기의 끝으로 달려간다. 배우의 활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연출이긴 하지만 마녀들이 가면을 벗으면서 맥베스의 악몽인 던컨, 벤쿠오의 모습으로 서늘하게 맥베스를 압박하는 장면이 좋았다. 아무 감정 없이 죽은 사람 또는 인형처럼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는 그들이 맥베스에겐 공포 그 이상의 존재였을테니.
원작의 유명한 매드씬, 레이디 맥베스의 붉은 손과 강박적인 행동은 릴리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맥더프 장군의 가족이 죽는 것은 매튜의 동생 톰이 처형당하는 것으로 겹쳐진다.
릴리는 죽어가는 병사를 살리려고 지혈을 하다가 손이 붉게 물들었다. 레이디 맥베스는 살인의 공포로 피로 물든 손의 환상을 본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새빨간 악몽은 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전쟁의 공포로 스스로 손을 찌른 매튜의 동생 톰은 제임스의 손에 이끌려온다.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보지만,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소리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장군의 냉정한 명령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상병으로 진급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었다. 동생을 그대로 보내야 하는 매튜나, 데리고 갈 수 밖에 없는 제임스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릴리, 그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제임스 자신, 또는 그들 넷 전부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 목숨을 왜 바치지 않았냐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매튜의 이 대사는 맥베스에서 가장 감정을 심하게 뒤흔든다. 김바다는 불편한 다리를 원망스러운 듯 쾅쾅 치면서 울먹여서 아마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달려가서 막아서든 함께 가든 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때 매튜가 처음으로 자신의 다리를 탓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끌려나가서 처형당하는 톰을 마크 장군인 병사2가 연기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배우 활용의 문제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는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톰의 처형 시점에서 아마 제임스와 릴리, 매튜는 마크 장군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매튜는 죽은 동생을 위해, 제임스는 사죄의 뜻을 담아, 릴리는 불합리함을 견디다 못해서.
그래서 맥베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콤, 맥더프, 맥베스의 전투씬은 굉장히 흥미롭다. 말콤을 연기하는 제임스는 그 순간 '말콤'이 아니라 '제임스'로써 '마크'를 대하고, 맥더프를 연기하는 매튜는 '매튜'로 '마크'를 본다. 오직 마크만이 '맥베스'의 시선으로 '말콤'과 '매튜'를 본다. 이런 엇갈림이 배우들의 눈빛만으로 전달이 된다. 말콤이 내뱉는 대사들은 명백히 제임스의 울분을 담고 있었고 맥더프가 쏘아붙이는 말들은 매튜의 한이었다.
매튜의 이 연설 끝에 마크 테일러의 이름이 나오면서 조명이 탁 바뀌는 연출은 가히 천재적이다. 순식간에 클라이막스로 향해 뜨겁게 내달리던 연극은 끝나고 서늘한 긴장이 새롭게 차오른다. 그리고 세 사람은 마크 테일러 장군을 사살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병사5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크 테일러의 죽음을 방관하거나 지지한 병사 역할을 맡아 장군의 명령을 감히 거역해야 하는 중책이다(?). 특히 박은석이 객석을 향해 체포를 명령하는 통에 그 느낌이 배로 살아났다. (장군님저희한테왜그러세요ㅠㅠㅠ)
마크의 죽음 이후 세 사람이 번갈아 이야기하는 세익스피어의 대사들은 종전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러 번을 들어도 늘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르는 대사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주어진 마지막 역할, 전쟁의 증인으로써 함께 군번줄을 흔들며 떠나간 병사들의 삶을 추모하게 된다. 그 때 한 마음으로 군번줄을 흔들면서 심장이 뒤흔들리는 그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안도감, 감격, 감동, 슬픔,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친다. 그렇게 벙커 트릴로지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맥베스는 완전하게 닫힌 결말로 막을 내린다.
마크 테일러는 전쟁 그 자체를 은유한다. 처음에는 나쁜 의도가 없었으나 가혹한 상황 속에 변해가고 인간성을 잃어가고 끝내 광기로까지 치닫는 과정을 한 인물에게 그대로 투영한다. 그리하여 마크 테일러, 전쟁 그 자체인 인물을 죽임으로써 '전쟁을 죽인다'. 그래서 맥베스는 가장 후련하고 마음 편한 엔딩이다.
벙커 트릴로지는 각각의 에피소드이지만, 이야기를 연결시키고 관통하는 상징이 있다.
- 모르가나에서 아이들이 들은 휘파람 소리는 알베르트가 휘파람부는 소리였을지도
- 가웨인과 랜슬롯은 알베르트의 총에 죽었을지도
- 영국군에 들어간 크리스틴의 미래는 릴리의 모습이었을지도
- 아가멤논에서 알베르트가 죽인 영국군은 모르가나의 아더였을지도
-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 가웨인, 알베르트, 마크(맥베스), 릴리(레이디 맥베스)
- 베개: 잠, 안식, 죽음, 살인
맥베스 최고의 조합은 신성민 이진희 김바다. 마크와 맥베스, 릴리와 레이디 맥베스, 매튜와 맥더프 사이의 접점과 감정 흐름을 가장 세심하게 잡아냈다. 신성민의 예민하고 도도한 마크는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맥베스의 성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진희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레이디 맥베스 톤은 릴리의 성품을 반영한다. 김바다의 맥더프는 매튜의 눈빛과 감정을 품고 있었다.
본진 이즈 뭔들... 이라지만 박민성 벤/벤쿠오/제임스/말콤 캐릭터 다 좋았고. 특히 '제임스'가 '말콤'을 연기하는데 다른 생각(마크 죽일생각) 하느라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제임스'라는 다층적인 연기가 참 좋았다. 안경 쓴 비주얼도 좋았고. 고전 대사톤도 예상 밖으로 너무 좋아서 나중에 진짜 세익스피어 한 번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전 톤으로는 박은석도 정말 좋았고 둘이 케미도 좋아서 나중에 고전으로 같은 무대 해도 좋을 것 같다.
전캐를 찍었지만 오종혁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말 하나같이 안취향이었기 때문. 하필 내가 본 날 대사 실수도 엄청 많았고, 감정, 발성, 연기 모두 아쉬웠다. 세 에피의 모든 캐릭 중 제일 괜찮았던 연기가 톰(매튜 동생)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
1918년 11월 11일 11시,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한다.
존경받는 장군과 그를 따르는 군대가 있다. 전쟁의 끝을 앞두고 즐겁게 연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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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총살형을 각오한 병사 셋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의 끝에서 장군을 처형하기 위해 연극을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맥베스'는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승리한 측인 영국군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세익스피어의 희곡과 전쟁의 사건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같은 듯 다른 듯 각자 흘러가던 이야기가 절묘하게 맞물리는 시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맥베스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관객을 병사5의 역할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영국군 신병으로 마크 장군님께 경례도 해야하고, 독가스에 죽은 병사들, 병동의 아픈 병사들, 마크 장군의 죽음에 동조한 병사들, 그리고 전쟁의 증인이라는 역할을 받는다. 거기에 더해서 연극 중에는 맥베스 왕의 연회에 초대된 손님이자 말콤 왕자를 따르는 버넘 숲의 병사 역할도 해야 한다. 실제로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 경례하고 군번줄 흔드는 것 뿐이지만 배우들의 대사와 행동으로 나도 모르게 작품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모르가나나 아가멤논은 사실 아더왕 전설이나 그리스 신화를 아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데, 맥베스 만큼은 세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알고 있을 때 소름끼치는 느낌이 몇 배로 다가온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20세기 영국군 참호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보이는 것이 흥미롭다.
'맥베스'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시점은 마크 장군이 아직 중위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100야드, 고작 100야드 전진했어!
대체 상부에선 무슨 생각인 거야? 작전이 있긴 해?
......
뭐, 이렇게 서로 미친듯이 쏴대다가 어느 한 쪽 총알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작전이겠지.
마크와 벤은 불합리한 상부의 작전에 분노하고 병사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드물게 훌륭한 장교였다. 아마 매튜나 제임스같은 병사들이 밝은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이들 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여기선 다들 썩은 물 때문에 설사를 하는데!
그래서 물에 석회를 타서 끓이잖아.
그럼 그 물이 마셔도 되는 물인지 썩은 물인지 구분도 안 된다고! 근데 차로 몇 마일만 더 가면 후방에선 차를 마시고 있어.
진짜 홍차를!
마크는 모순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도 비극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쟁의 광기가 강해지면서 더 비인간적이고 말도 안되는 모순이 발생한다. 홍차는 그 은유적인 객체로 등장한다.
홍차,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밝은 조명과 아름다운 음악, 예쁜 찻잔, 따뜻한 적갈색 액체, 피어오르는 향, 우유를 넣으면 하얗게 번지는 모양새, 함께 즐기는 달콤한 디저트, 느긋한 여유, 평화, 고상함. 이 모든 건 전쟁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같은 전선 안에서도 누군가는 그걸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투표를 했다면 마크가 장군이 됐을 거라는 둥, 공화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겉으로 유하고 물렁하고 사람 좋아보이는 벤이지만 사실 가장 단단하고 굳센데다가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어쩌면, 벤이 살아남았다면(ㅠㅠㅠ) 책을 썼을 것이고 전쟁을 막으려 노력하고 공화정을 세우기 위해 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있지.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개인적으로 맥베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남아있는 것이 이 때의 벤의 선언이다. 괜찮은 척 하지만 사실은 잠 못 이루고 힘들어하던 사람, 책 속으로 도망치며 겨우 버텨온 시간들, 그리고 그 끝에서 얻은 교훈. 안경 너머의 눈빛과 책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제스쳐, 글자 하나하나에 묵직하게 실린 감정이 가슴에 훅 밀려들어온다. 자신이 지독하게 겪었기에 말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마크의 승진 소식. 여기서 '코더 대대를 이끌게 되었다' 고 소개하는데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코더의 영주가 된다'는 것과 연결된다. 벤은 반쯤 장난으로 경례를 붙이는데, 여기서 마크 역의 배우들의 표현이 다른 게 재밌었다. 박은석은 화들짝 손사래 치면서 아우, 그런 거 하지 마~ 민망해 한다면 그 대사 신성민은 안 했다. 왠지 좀 즐기는 것 같았어.
갑자기 독가스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마크는 매튜에게 자신의 방독면을 씌워준다. 단순히 연락하려고 온 그에게 나눠줄 여분이 없는 상황에서 목숨 걸고 부하를 먼저 챙긴 거다. 정작 자신은 소매로 입을 틀어막고 버티면서. 마크가 부대 내 가장 훌륭한 장교로 꼽힌 것도 능력 뿐만 아니라 이런 성품이 큰 역할을 했을 거다.
독가스의 중독되며 맥베스의 마녀의 예언 장면이 겹쳐진다. 맥베스가 왕이 될 것이며,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그 예언은 극중 맥베스를 파멸로 이끄는 예언이기도 했고, 현실에선 독가스에 정신을 잃은 마크의 꿈 또는 환각이기도 했다.
다들 네가 장군이었다면 이정도로 최악은 아니었을 거라고 해.
만약 투표로 장군을 뽑는다면 분명 네가 장군으로 추대될 거라고 말이야.
......
난, 당신같은 사람이 장군이 되면 좋겠어요.
그럼 최소한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죠.
벤과 릴리의 이 대사는 마녀들의 예언처럼 마크에게 전해진다. 예언이라기보다 그저 바램이지만, 결국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맥베스는 초반에 꽤 가벼운 장면들이 많다. 마크와 벤의 이야기, 병원에서 마크와 릴리가 보여주는 미묘한 긴장과 둘을 놀리는 듯 아닌 듯한 매튜. 그러나 배경이 영국군 참호를 벗어나 '연극 맥베스'가 되는 순간 긴장감은 크게 높아진다.
마치 찬란한 등극의 서막같다.
내가 왕이 될 운명인가.
내가 애쓰지 않아도 왕관은 내 것이란 말인가.
두려운 암시다.
내가 왕이 되려면 지금의 왕이 죽어야 한다.
......
말콤 왕자가 있으나 맥베스가 왕이 된다.
그리고 퓰리어스가 왕이 된단 말인가.
맥베스의 자손이 아닌 나의 아들이 왕이 된다.
마치 찬란한 비극의 서막 같다.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맥베스와 벤쿠오의 반응은 이다지도 달랐다. 글래미스의 영주에서 코더의 영주가 되며 예언을 이룬 맥베스와 그를 따르면서도 경계하는 벤쿠오의 관계는 마크와 벤을 그대로 닮아있다. 벤 또한 마크의 승진을 예상하긴 했지만 곧바로 소령이 될 줄은 몰랐고, 그 점에 대해 축하와 동시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벤쿠오의 심정을 읽은 듯이 말을 돌리는 맥베스 역시 이미 벤쿠오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연극 맥베스와 영국군의 현실이 가장 절묘하게 맞물리는 순간은 편지와 던컨왕의 죽음이다.
마크가 릴리에게 준 편지가 맥베스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가 되고, 드레이크 장군의 죽음이 던컨 왕의 죽음으로 은유되는 순간, 그 연결이 짜릿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신이시여,
이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그래서 제 기도를 들어줄 수 없다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내가, 맥베스의 부인인 내가 마녀들의 말이 진실이 되도록 그렇게 만들어보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제 기도입니다.
언제 들어도 늘 무서운 레이디 맥베스의 기도에 이어, 마크가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마크에게도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장군이 돌아가면 자신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총살당할테니. 잘못이라고는 그저 작전이 필요하다고 말 한 마디 한 것 뿐인데, 희생이 작전이라는 개소리에 반박한 것 뿐인데. 분명 드레이크 장군은 쓰레기였고, 마크는 어쩌면 그를 살해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벤...
그 때부터 맥베스는 잠들지 못하는 날을 보낸다. 피로 물든 손을 닦으며 악몽에 시달리고 후회를 거듭하기 시작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나약해지는 맥베스를 더 진득한 광기로 이끈다. 빨간색 레이저가 핏빛처럼 손을 적시고 달아날 곳 없는 끝으로 둘을 몰아세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한 마크와 릴리도 잠들지 못하고 시달리게 된다.
맥베스는 잠을 죽였노라.
더 이상 잠들 수 없다.
하루의 삶 끝에 오는 죽음,
엉킨 근심의 실타래를 푸는 그것,
생명을 위한 식사,
맥베스는 그 잠을 죽였노라.
영국군으로 돌아오면, 마크는 사망한 드레이크 장군을 대신해 임시로 장군이 된다. 마크가 드레이크 장군을 살해했다는 걸 아는 목격자, 벤은 언제나처럼 책을 읽으며 고민을 털어낸다.
분명 던컨왕의 죽음은 너의 짓일 것이다.
......
허나 다음 왕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나다.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하자.
...그래, 조용히, 조용히 하자...
마지막 말은 벤이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크의 살인을 함구하자, 입을 다물자. 진실을 보고도 외면하는 것이 그토록 곧은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그러나 벤은 아직 마크를 믿고 있었다.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은 처음의 허물없는 모습이 아니다. 어딘지 불안해보이는 마크와 왠지 거리를 두고 어색해하는 벤, 둘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는 던컨 왕을 살해한 맥베스가 벤쿠오를 경계하는 모습과 그대로 연결된다.
내가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벤쿠오 뿐이다.
벤쿠오의 고결한 성품이 두렵다.
마녀들은 내 머리에 열매를 맺지 못할 왕관을 씌워주고,
손에는 말라붙은 왕홀을 쥐여줬다.
내가 왕관을 쓴 머리로 잠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벤이 외출 나가기 전 '읽어봐' 라고 말하는 듯 찍어준 페이지에는 마크의 두려움을 꿰뚫는 구절이 씌여있다. 마크는 친구인 벤의 고결한 성품을 잘 알았고, 그가 진실을 알까 두려워했다. 벤의 성격 상 진실을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마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읽던 책을 쾅 내리치면서 발성 싹 바뀌고 '맥베스'로 연결되는 연출이 정말 좋았다.
분명 시작할 때는 레이디 맥베스가 맥베스를 이끌어 왕을 죽이고자 했는데, 이 시점에서 주체가 달라진다.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예언을 깨기 위해 부자를 동시에 죽이려 계략을 세우는 맥베스와 그 모습에 두려움과 혐오를 동시에 보이는 레이디 맥베스가 있다. 이는 레이디 맥베스를 연기한 릴리의 감정과도 연결된다.
이어지는 장면은 매튜와 제임스가 마크 장군 방을 만드는 장면인데, 전체 에피소드 중에 유일하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곳이다. 긴장을 좀 풀고 가라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고. 매튜의 동생 톰이 상병으로 진급했다는 얘기를 기본으로 각종 애드립의 향연이 펼쳐졌다. 박민성과 강승호가 만났을 때 제일 재밌었다. 둘이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하찮은 덤앤더머가 되서 서로 귀여워하고 디스하고, 매우 흥미진진했다. 언젠가부터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던 씬이다. 다음에 매튜가 장군 흉내 내는 것도 워낙 하찮고 웃겨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게 좋았고, 마크 들어오면서 공기가 확 식는 그 느낌마저도 좋았다.
장군이 된 마크가 들어오면서 공기는 달라진다. 여기서도 배우들마다 변해가는 포인트가 다른 것이 재미있었다. 박은석은 이미 방에 들어올 때부터 살짝 맛이 가기 시작했고, 신성민은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만 해도 원래의 마크 테일러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매튜가 장군 흉내 내는 걸 보고 장난스레 동조해주다가 괜찮다고 웃어주는 장군이었다.
아쉬우실 것 같습니다.
여기 잠시 계시다가 정식으로 부임받은 분이 오시면 다시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임시로 저희를 지휘하시는 거지만, 그래도 계속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다들 불만이 많았거든요.
매튜가 보여주는 마크에 대한 무한 신뢰는 마크가 훌륭한 장군이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맥베스의 불안이 벤쿠오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예언 때문이었다면 마크의 불안은 임시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누군가 자신의 살인을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바그너와 홍차. 그 때부터 마크는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다. 누가 그걸 뿌리칠 수 있을까.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주어졌다. 남의 것이기에 쳐다볼 생각조차 않던 것들이 손에 떨어졌다. 이 달콤한 유혹을 떨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조심스럽게 찻잔을 집어들고 한 모금 음미하다가 지도 위의 동그란 자국에 굳이 찻잔을 맞추어 놓아본다. 음악이 높아지며 눈빛이 변해간다. 이 자리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지도 위에서 마치 놀이를 하듯이 사람과 말 모형을 흩뿌린다. 소름돋는 기관총소리와 아련히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리고 그 위를 덮는 바그너의 음악. 이곳은 전쟁터였으나 전쟁터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비명은 멀리서만 환상처럼 들려오고, 후방에 물러나 앉은 장군에게 죽어가는 병사들은 넘어지는 인형 만큼이나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한다.
어이, 신병! 훈련장과 전쟁터의 차이를 아는가?
실제로 적은 있다는 거.
그리고, 실제로 장군은 없다는 거.
......
너도 이제 여기 없겠구나.
...뭐?
장군은 전쟁터에 없다.
마크 테일러 중위는 '전쟁터에 있던' 장교였고 존경받는 상관이었다. 그러나 마크 테일러 장군은 '전쟁터에 없는' 장군이 되어버린다. 처음엔 자신은 다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드레이크 장군처럼 그렇게 아무나 쉽게 희생시키고 작전없이 무모하게 굴지 않을 거라고. 자신은 분명 더 나을 거라고 자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같아졌다. 그리고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벤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마크를 찾아간다. 한 때 동고동락했던 전우, 믿을 수 있었던 친구.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맞붙는 이 장면은 맥베스에서 가장 긴장감이 높은 장면 중 하나다. 나직하지만 단호한 벤과 그를 짓누르려는 마크의 기세가 날카롭게 부딪힌다. 마크가 벤의 기를 누르려고 보이는 행동도 배우마다 달랐는데, 신성민은 지휘봉을 테이블에 세게 내리치면서 공기를 확 식게 만들다가 벤이 팔을 붙잡으니 놓을 때까지 노려보고 어깨에 대고 피아노 치면서 여유를 부리다가 하며 사람을 쥐락펴락 했다. 빈정대는 듯한 서늘한 눈빛이 아주 일품이었다. 박은석은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잡힌 팔을 탁 쳐내고 멱살잡아 돌려 세워져있던 옷깃 촥촥 접어주는데 세상 그렇게 재수없을 수가 없었다.
드레이크 죽은 걸 보고하지 않은 이유는 드레이크가 살인자이기 때문이었어. 군인이 아니라 살인자!
넌 아니니까!
그러니까 괜찮을 거다!
벤은 그 순간까지도 희망을 갖고 있었다. 분명 편지 얘기는 그를 마지막으로 떠보기 위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테이블 위의 작전지도, 그 위의 동그란 찻잔자국. 벤의 손끝이 찻잔 자국을 꾹 누르듯이 덧그리고 눈빛에 슬픔이 들어찬다. 변해버린 친구를 향한 안타까움과 단호한 결심.
네 말을 믿을까?
상관없어. 난 진실을 말하는 게 중요해.
그래? 그래... 너한테는 그렇겠다.
그런데 그거 하극상이고 반역이다?
뭐라고?
넌 총살이라고!
자신을 거침없이 쏘고 품에서 편지부터 찾는 마크를 보는 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마크, 마크,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지만 돌아오는 건, 탕-. 숨통을 끊어놓는 총소리 뿐이다. 벤 중위의 죽음은 그대로 벤쿠오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벤이 마크에게 이야기하면서 쓰고있던 안경을 벗는데, 앞서 잠깐 나온 벤쿠오가 안경을 안 쓰는 덕분에, 죽은 벤은 그대로 벤쿠오의 유령이 되어 맥베스의 연회에 나타난다. 맥베스의 악몽에 벤쿠오가 있었듯이, 마크의 악몽에는 벤이 나타났을 것이다. 또한, 맥베스를 향한 벤쿠오의 원망은 마크를 향한 벤의 질책이기도 했다.
맥베스, 맥더프를 조심하라!
맥베스, 너의 눈에 나타난 모든 것은 널 슬프게 하리라.
버넘 숲이 던시네일로 전진하지 않는 한 너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여인이 낳은 자는 너를 해칠 수 없으리라.
던컨과 벤쿠오를 연이어 살해한 맥베스는 맥더프의 가족들까지 살해하며 돌아올 수 없는 광기의 끝으로 달려간다. 배우의 활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연출이긴 하지만 마녀들이 가면을 벗으면서 맥베스의 악몽인 던컨, 벤쿠오의 모습으로 서늘하게 맥베스를 압박하는 장면이 좋았다. 아무 감정 없이 죽은 사람 또는 인형처럼 가만히 노려보기만 하는 그들이 맥베스에겐 공포 그 이상의 존재였을테니.
원작의 유명한 매드씬, 레이디 맥베스의 붉은 손과 강박적인 행동은 릴리의 행동으로 이어지고 맥더프 장군의 가족이 죽는 것은 매튜의 동생 톰이 처형당하는 것으로 겹쳐진다.
릴리는 죽어가는 병사를 살리려고 지혈을 하다가 손이 붉게 물들었다. 레이디 맥베스는 살인의 공포로 피로 물든 손의 환상을 본다. 닦아도 닦이지 않는 새빨간 악몽은 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사람 몸에는 피가 정말 많아요.
전 몰랐어요. 아마 아무도 몰랐을 거에요.
아무리 향기로운 향수를 쓴다 해도 이제 이 작은 손 하나를 다시 향기롭게 만들 수는 없겠죠.
전쟁의 공포로 스스로 손을 찌른 매튜의 동생 톰은 제임스의 손에 이끌려온다. 살려달라고 애원을 해보지만,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소리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장군의 냉정한 명령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상병으로 진급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었다. 동생을 그대로 보내야 하는 매튜나, 데리고 갈 수 밖에 없는 제임스나,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릴리, 그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제임스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가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제임스 자신, 또는 그들 넷 전부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 목숨을 왜 바치지 않았냐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같은 편이잖아!
전쟁은, 적군을 죽이는 거 아니에요?!
......
적들도 우리와 같을 거에요.
매튜의 이 대사는 맥베스에서 가장 감정을 심하게 뒤흔든다. 김바다는 불편한 다리를 원망스러운 듯 쾅쾅 치면서 울먹여서 아마 다리만 멀쩡했더라면 달려가서 막아서든 함께 가든 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때 매튜가 처음으로 자신의 다리를 탓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끌려나가서 처형당하는 톰을 마크 장군인 병사2가 연기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배우 활용의 문제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는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톰의 처형 시점에서 아마 제임스와 릴리, 매튜는 마크 장군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매튜는 죽은 동생을 위해, 제임스는 사죄의 뜻을 담아, 릴리는 불합리함을 견디다 못해서.
그래서 맥베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말콤, 맥더프, 맥베스의 전투씬은 굉장히 흥미롭다. 말콤을 연기하는 제임스는 그 순간 '말콤'이 아니라 '제임스'로써 '마크'를 대하고, 맥더프를 연기하는 매튜는 '매튜'로 '마크'를 본다. 오직 마크만이 '맥베스'의 시선으로 '말콤'과 '매튜'를 본다. 이런 엇갈림이 배우들의 눈빛만으로 전달이 된다. 말콤이 내뱉는 대사들은 명백히 제임스의 울분을 담고 있었고 맥더프가 쏘아붙이는 말들은 매튜의 한이었다.
맥베스!
나는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너를 죽여서 기괴한 동물을 전시하듯 전시할 것이다.
.....
보라! 이 폭군을 보라!
보라! 이 미친 권력자를 보라!
자신의 권력과 욕망에 눈이 멀어
전우들을 무참히 희생시킨...!
전쟁이 낳은 괴물,
마크 테일러 장군을 보라...!
매튜의 이 연설 끝에 마크 테일러의 이름이 나오면서 조명이 탁 바뀌는 연출은 가히 천재적이다. 순식간에 클라이막스로 향해 뜨겁게 내달리던 연극은 끝나고 서늘한 긴장이 새롭게 차오른다. 그리고 세 사람은 마크 테일러 장군을 사살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병사5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마크 테일러의 죽음을 방관하거나 지지한 병사 역할을 맡아 장군의 명령을 감히 거역해야 하는 중책이다(?). 특히 박은석이 객석을 향해 체포를 명령하는 통에 그 느낌이 배로 살아났다. (장군님저희한테왜그러세요ㅠㅠㅠ)
마크의 죽음 이후 세 사람이 번갈아 이야기하는 세익스피어의 대사들은 종전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여러 번을 들어도 늘 가슴이 뜨겁게 벅차오르는 대사다.
우리는 이 전쟁의 증인입니다.
살아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대신 그들이 죽은것 뿐.
천 만 명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진실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곧 종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부디 저희와 함께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
꺼져라, 꺼져라, 찰나의 촛불이여
인생이란 그저 걸어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 머무르는 동안은 우쭐대고 투덜대며 걷지만
곧바로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그것은 바보천치들이 지껄이는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의미없는 이야기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드리우고
어둠 속을 걷는 배우들은 빛을 향해 걸어가나니
이 초가 다 타 한숨처럼 꺼진다 해도
우리의 눈동자는 꺼지지 않고 영원히 빛날 것이다
타올라라 타올라라 찬란한 촛불이여
버넘 숲을 태우고 던시네일로 향하며 우리 모두를 비추어라
타올라라 타올라라 찬란한 촛불이여
그리하여 관객들은 주어진 마지막 역할, 전쟁의 증인으로써 함께 군번줄을 흔들며 떠나간 병사들의 삶을 추모하게 된다. 그 때 한 마음으로 군번줄을 흔들면서 심장이 뒤흔들리는 그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안도감, 감격, 감동, 슬픔, 복합적인 감정이 한꺼번에 몰아친다. 그렇게 벙커 트릴로지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맥베스는 완전하게 닫힌 결말로 막을 내린다.
마크 테일러는 전쟁 그 자체를 은유한다. 처음에는 나쁜 의도가 없었으나 가혹한 상황 속에 변해가고 인간성을 잃어가고 끝내 광기로까지 치닫는 과정을 한 인물에게 그대로 투영한다. 그리하여 마크 테일러, 전쟁 그 자체인 인물을 죽임으로써 '전쟁을 죽인다'. 그래서 맥베스는 가장 후련하고 마음 편한 엔딩이다.
벙커 트릴로지는 각각의 에피소드이지만, 이야기를 연결시키고 관통하는 상징이 있다.
- 모르가나에서 아이들이 들은 휘파람 소리는 알베르트가 휘파람부는 소리였을지도
- 가웨인과 랜슬롯은 알베르트의 총에 죽었을지도
- 영국군에 들어간 크리스틴의 미래는 릴리의 모습이었을지도
- 아가멤논에서 알베르트가 죽인 영국군은 모르가나의 아더였을지도
-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 가웨인, 알베르트, 마크(맥베스), 릴리(레이디 맥베스)
- 베개: 잠, 안식, 죽음, 살인
맥베스 최고의 조합은 신성민 이진희 김바다. 마크와 맥베스, 릴리와 레이디 맥베스, 매튜와 맥더프 사이의 접점과 감정 흐름을 가장 세심하게 잡아냈다. 신성민의 예민하고 도도한 마크는 신경질적이고 불안한 맥베스의 성격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진희의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레이디 맥베스 톤은 릴리의 성품을 반영한다. 김바다의 맥더프는 매튜의 눈빛과 감정을 품고 있었다.
본진 이즈 뭔들... 이라지만 박민성 벤/벤쿠오/제임스/말콤 캐릭터 다 좋았고. 특히 '제임스'가 '말콤'을 연기하는데 다른 생각(마크 죽일생각) 하느라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제임스'라는 다층적인 연기가 참 좋았다. 안경 쓴 비주얼도 좋았고. 고전 대사톤도 예상 밖으로 너무 좋아서 나중에 진짜 세익스피어 한 번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전 톤으로는 박은석도 정말 좋았고 둘이 케미도 좋아서 나중에 고전으로 같은 무대 해도 좋을 것 같다.
전캐를 찍었지만 오종혁의 이야기는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정말 하나같이 안취향이었기 때문. 하필 내가 본 날 대사 실수도 엄청 많았고, 감정, 발성, 연기 모두 아쉬웠다. 세 에피의 모든 캐릭 중 제일 괜찮았던 연기가 톰(매튜 동생)이었으니 말 다했지 뭐.

